1.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책으로는 몇 년 전에 읽었다. 백만 부를 돌파했다고 했을 때 사서 읽었었다. 후딱 읽었고 그렇군 하고는 끝냈다. 색다른 것이 없었다. 최근에 영화화되면서 페미니즘 논쟁이 붙었고, 시드니에서도 상영되고 있어서, 딸의 권유로 아내와 함께 봤다. 한국 영화니까 당연히 손님은 많지 않았다. 27명이었는데 그중 남자는 7명이었다. 도중에 뒤에 앉은 여성의 흐느끼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내와 딸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여자의 일생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내 가족의 이 두 여성은 이미 그런 일생을 오래 살아왔기에, 별로 새삼스럽지 않았나 보다. 사실 자녀의 탄생과 육아는 대단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한 아이를 낳고 먹이고 키우는 일이, 적어도 한국적 전통에서는, 여성의 몫이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눈 내리고, 벚꽃 내리는 날, 예쁜 딸이 나왔다.” 눈이 내릴 때는 ‘김지영’의 엄마가 ‘김지영’을 낳았고, 벚꽃 내리는 날에는 ‘김지영’이 ‘김지영’의 딸을 낳았다.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태어났지만, 여자라는 것 때문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그게 숙명인 양하고 산다.

2.
그러나 이제 사회가 많이 변했다. 소설과 영화를 보면서 남자들이 이렇게 항변한다. “너희 여자만 힘드냐?”… 영화 화면에 중국어 자막이 붙었다. 김지영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데, 중국어로는 ‘노공(老公)’이다. ‘늙을 노’에 ‘공자 공’. 젊지만 지혜롭고 자상하여, 대단히 훌륭한 남편이다. 아내가 힘든 것을 알고는 자신의 사회적 경력을 뒤로 밀쳐 놓으며 육아휴직을 신청하려 한다. 물론 아내 ‘김지영’도 잘한다. 자신에게 심각한 증상이 있는 것을 알고는 적극적으로 고치려 한다. 사실 젊은 시절에 이런 부부는 거의 없다. 잘 생기고, 예쁘고, 재능이 있는데 더하여 상대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놓은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상업적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 정유미와 공유가 연기하는데 어찌 감동이 없을 것이며, 원작자도 이미 밀리언셀러 작가가 되었고, 영화 역시 160만 명의 손익분기점을 넘어 이미 3백50만 관객을 돌파하고 있으니. 모두가 성공이다. 따라서 영화는 우리 모두의 것이면서도, 또한 아니다. 그래서 나나 식구들이 별로 감동을 받지 못했나 보다. 삶의 현실은 영화의 그것보다 더 팍팍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어두운 극장 뒷좌석에 남몰래 눈물을 흘리던 그 여성과 우리 모두다.

3.
영화가 끝나면서 들려오는 OST가 내 마음을 두들겼다. 돌아와 유튜브를 뒤졌다. 무한 반복으로 틀어 놓고 이 글을 쓴다. 

“깊게 뿌리 내린 내 마음에 / 작은 바람이 불 때면
난 자신하네 나에게 / 흔들리지 않음을

네가 불기 전엔 누구도 / 나를 흔들 수 없었네

흔들흔들 내 맘이 / 왜 이리 요동치는지
그저 잠시 불다가/ 날 스쳐 가길”

인생에는 필연적으로 바람이 분다. 우리는 그 앞에 선 갈대며, 꺼져가는 촛불이다. 흔들흔들, 간당간당. 인간의 숙명이 그렇다면 그 모진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절대 꺾어 지지도, 꺼지지도 말아야 한다. 물론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죽겠다고’ 소리 지르며 함께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4.
그래서 시인 윤동주의 <산울림>시를 읽는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 
아무도 못 들은 산울림
까치가 들었다. 산울림 
저 혼자 들었다. 산울림”

나 자신에게 절망한 나는 귀를 기울인다. 까치는 자기 소리 밖에 못 듣지만, 나는 나에게 말씀하시는 한 분의 음성을 듣는다. 세상의 바람 소리, 남의 소리, 내 속의 소리를 잠시 뒤로 하고, 산문과 시로 되어 있는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 들릴 때까지 듣는다. 때가 되면 세상의 온갖 바람이 고요해진다. 그 자리에서 난 참회의 무릎을 꿇는다. 평생 내가 괴롭게 했던 모든 사람도, 그분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인생의 해답은 우리에게 없으니, 오직 당신이 해결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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