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SKYDIVE’ 선샤인코스트 지점 관리
파란만장한 호주 생활.. ‘워킹 온 에어’로 영화화

그야말로 땅그지였다. 나름 큰 포부를 안고 호주땅을 밟았으나 오자마자 거지가 됐다.
29살, 막 서른의 문턱을 넘어서려고 할 때 어머니가 20살 때 고등학교 졸업선물로 주신 금 목걸이를 팔아 비행기 값을 마련하고 처음 호주땅을 밟았다.

오자마자 백패커에서 지갑을 도난 당하고 도착한지 이튿날 국제 거지가 돼버렸다. 그러다 만난 스카이다이빙. 운명과도 같은 만남을 갖고 난 후 현재 스카이 다이빙 회사 ‘1300SKYDIVE’ 선샤인코스트 지점 운영을 맡고 있는 백은성 스카이다이빙 교관이 한호일보를 찾았다. 

한인으로는 호주에서 유일하다. 스카이다이빙 코치(Coach)로 그리고 교관(Instructor)으로 457 스폰서 비자로 일을하고, 퀸즐랜드 선샤인코스트 지점 운영을 맡고서도 계속 바뀌는 이민법으로 인해 올해 4월에서야 영주권을 받았다. 

기자도 스카이다이빙을 해본 적이 있다. 경비행기를 타고 3~4,000미터 상공으로 서서히 올라갈 때의 긴장감, 뛰어내린 순간의 아찔함, 이후에는 기압으로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도 수반한다. 그러다 활짝 낙하산이 펼쳐지면 그야말로 절경이 펼쳐진다. 
짧은 시간동안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다는 스카이다이빙은 이렇듯 아픔과 고통 그리고 기쁨과 감격이 계속 교차된다. 
호주에서의 그의 삶도 ‘스카이다이빙’ 같았다. 

무모한 도전의 시작 

한국에서 꽤 인정 받는 쉐프로 일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요리라고 생각해 열심히 했다. 세계요리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경력에 미국 하와이에 위치한 힐튼호텔에서 일할만큼 쉐프로서의 자리를 얻었지만 일을 하면서도 시계만 쳐다보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고 열심히 일했지만 통장은 늘 ‘텅장’이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2011년 3월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했지만 도전정신 하나로 호주에 왔고 거지가 됐다. 시드니하이드파크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고 길거리를 배회하며 지냈다. 죽으려고도 했다. 나름 유서를 메신저로 보내고 신발도 가지런히 벗어놓고 바다에 뛰어들어 보기도 했는데 차디찬 바닷물에 놀라 금방 다시 헤엄쳐 나온 적도 있다. 

그렇게 노숙자 생활이 6주쯤 흘렀을때쯤 실버워터에 위치한 한 물류창고에서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시티에서 꼬박 이틀 가량을 걸어서 실버워터까지 갔다. 

몰골도 말이 아니고 냄새도 나고 하다보니 직원이 창고내 샤워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줬다. 호주에서 처음 돈을 벌게 됐기에 열심을 다했고 단기 아르바이트생에서 장기 직원으로 변경됐다. 돈이 없었기에 창고 뒷켠에서 노숙을 하다 돈을 벌어 쉐어생으로 삶이 승격?!되기도 했다. 

이후 워킹홀리데이 세컨비자를 위해 다윈에 위치한 멜론농장에서 일을 했다. 그곳에서도 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지게차 자격증을 땄다. 

그러던 중 농장에서 유통하는 시드니의 플리밍톤 마켓에 한인 과일 거래처들이 상당한데 의사소통으로 문제가 계속 발생하면서 지게차 면허가 있고 한국어,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답은 오직 yes 아니면 no로 밖에 할 수 없을 때였지만 지원해서 시드니로 바로 넘어왔다. 

돈도 벌고 조금 안정된 생활을 하다 보니 호주 곳곳을 여행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스카이다이빙을 만났다. 현재는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당시 한국인 스카이다이빙 교관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무모한 도전’은 시작됐다. 

도전에는 마침표가 없다

스카이다이빙 교관이 되려면 1000번 이상 뛰어야 한다. 금액이 상당한데, 대략 대학 학비 이상 소요된다. 

영주권을 위해 대학을 다닌다는 생각으로 스카이다이빙에 그야말로 ‘올인’했다. 학생비자를 유지해야 했기에 야간 학교를 다니면서 새벽부터 일을 하고 또 훈련하고 돈이 모이면 하늘을 날았다. 
스카이다이빙 교관이 되려면 AFF 교육을 시작으로 라이센스 F까지 취득을 해야 하는데 정해진 구간 30m안에 착륙, 여러명하고 함께 공중에서 정해진 대형 만들기 등 A-F까지 각 단계에 주어지는 과제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

500회 이상을 뛰게 되고 AFF 강사 자격증까지 따게 되면 훈련생들을 교육하게 되는데 실제 이때쯤 적성과 맞지 않아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손님들이 자신을 믿고 의지해서 뛰어내리기까지 심리적인 안정감을 줘야 하기에 소통도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언어적 장벽이 있다보니 강의 스크립트를 준비해 외우고 또 외웠다. 돈을 벌고 학교도 다니며 열심히 하늘을 날다 보니 4년여 시간이 흘렀고, 교관이 됐다. 

도전으로 찾아온 새로운 기회
학비와 스카이다이빙 비용을 충당해야 했기에 항상 일이 필요했다. 기왕이면 다이빙장에서 일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버스운전면허증을 따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보통 하루에 약 4시간 정도 픽업장소와 다이빙장을 왕복 운전하는 일을 했는데 페이가 상당히 높았다. 

너무 많은 페이를 받는 것 같아 회사에 미안한 생각이 들어 시키지도 않았지만 쓰레기통을 비우고 청소를 했고, 심지어 스스로 한인 웹사이트에 광고를 올려 손님을 데려오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사장에 눈에 띄었다. 손님을 데려오면 점프티켓 1장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무려 500장이 모였을 정도. 

한인 고객들이 많이 늘어나 회사 예약시스템을 하게 됐고, 인보이스를 발행하면서 회계 등 전반적인 업무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사장은 선샤인코스트 다이빙 지점을 2년전 나에게 맡겼다. 직원은 리셉션, 버스운전기사, 파일럿, 스카이다이빙 교관 등 약 20여명 정도가 현재 함께 일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번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우연히 한 사이트에서 영화제작을 위한 스탭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연락해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떨까 생각해 연락했고, 영화 ‘워킹 온 에어(Working on air)’가 탄생했다. 

영화 ‘워킹 온 에어(Working on air)’

영화 스윙키즈, 남한산성 등의 연출부로 일한바 있는 고창희 PD는 호주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영어공부를 위해 왔지만 단편영화를 제작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고, 이로빈 감독, 앤디 최 감독 등을 만나고 또 백은성 교관을 만나면서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주연 배우는 호주안에서 여러 차례 오디션을 보고 사람을 찾아봤지만 여의치 않아 한국에서 김근혁 배우를 섭외했다. 

약 8년간의 이야기를 26분으로 담다보니 실제 이야기와 조금 다르게 각색되기도 했지만 그가 전해주고픈 희망의 메시지는 고스란히 담겼다. 

영화는 미국 제7회 유니버스 멀티컬처럴 필름 페스티벌 경쟁작, 한국 제4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 경쟁작 부문에 올랐으며, 미국 2019 써니싸이드업 필름 페스티벌에서는 베스트 촬영(cinematography), 베스트 포스터 상을 수상했다. 

엔딩곡으로 백 교관은 신승훈의 ‘전설속의 누군가처럼’을 강력히 고수했고, 기적과 같이 가수 신승훈 소속사로부터 너무나도 쉽게 사용허가를 받았다. 

비자 때문에 능숙했던 요리를 할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택했던 호주에서 다시 요리의 길로 가는 것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남들이 보기에는 무식하리만큼 무모하게 도전했고, 그의 삶으로 그의 영화로 이제는 하늘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통해 희망을 전한다. 신승훈의 노랫말처럼 말이다.

“그대 아직 늦지 않았어 두 팔을 벌려 너의 날개를 펴고
전설 속의 누군가처럼 그대의 미래를 향해 훨훨 날아봐”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2wO4i-_O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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