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몸이 불편해 사업에서 은퇴한 오랜동안 알아온 지인 가족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었다. 차가운 날씨였지만 지팡이를 짚고 오랜만이라며 환하게 웃는 얼굴에는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마음에서 솟아나는 따스함과 활기가 있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 나누는 대화는 오랜 세월 정겹게 살아온 단편인 듯 점심 후의 향내나는 커피처럼 정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내 옆에 앉은 오십을 바라보는 미혼의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눈길은 애틋해 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세월을 보낸 체념의 마음과 애잔한 마음이 들어도 세상사가 뜻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인생의 이치에 순응해야하는  안타까움도 배였다. 부모에 대해서 마음으로 행동으로 너무나도 착한 아들인데, 프로포즈 할 대상없이 혼자 사는 아들을 바라보는 은퇴한 부모의 마음은 늘 애잔하고 안쓰럽다. 부모에게 천상 효자이나 본의 아닌 불효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결혼하지 않은 나이든 자식은 부모에겐 늘 근심거리다. 나도 30중반의 미혼 아들이 있어 이제 포로포즈를 하려고 돈을 모은다는 말을 들으니 언제 충분히 돈을 모을까 궁금해진다.  다행히 호주의 결혼은 부모에게 그다지 큰 짐을 지우지 않는 풍토이니 자식만 잘 준비하면 곧 결혼을 하고 안정되고 도란도란 아내와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를 가질 수 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아들이 결혼을 하면 집을 장만해 주고 예단을 하고 상대에 걸맞게 결혼식을 준비하다보니 자식 둘을 시집 장가 보내면서 집한 채는 팔아야 한다고 혀를 내 두른다. 그 친구는 자식 둘을 결혼시키고 일찌감치 사업을 정리하고 다행히 보험에서 제법 나오는 돈이 있어 갓난 아이들을 돌봐 주며 여념이 없이 생활하고 있다. 이제 자식을 결혼 시켰으니 내 몫을 했다는 자부심과  끝까지 자식들에 매여사는 한국의 풍토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자기 위안이 감지된다. 이방인 같은 내 귀엔 고작 이럴려고 살았나하는 볼멘 질문이 남는다. 

허례와 허식을 타파하자는 국가적인 혁명적 슬로건은 우리 세대가 가난한 대한민국에서 자라며 평생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무색하게도, 웬만큼 잘 살게 됐다는 현대에 이르러도 체면을 세우고, 뻔한 셈법으로 주고 받는 인사 치례는 진심과 인정은 사라지게 하고 대신 그 자리에 허세와 허구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게 된 병적 증상으로 뿌리 내린 듯하다.  
웬만한 보석으로는 창피해서 프로포즈도 못한다는 이 세대의 통념은 돈 없고 배경없는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더욱 진정한 사랑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쌓이게 한다. 비싼만큼 사랑의 진심이 담겼다는 것이 과연 맞는 계산 법일까? 그것이 진실일 수 있을까? 화려하고 기상천외한 값비싼 프로포즈를 지나 결혼을 하고 머잖아 이혼을 공포하는 많은 커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TV나 신문에서 거의 매일 쏟아져 나오는 가십이 아니더라도  이미 얼마나 왜곡된 사랑으로  팽배한 허구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 우리 스스로 시인 하지 않을 수  없다. 
90을 바라보는 장모님은 젊었을 때 나에게 돈 한 푼 없이 OO 두쪽 만 갖고 장가 왔었다고 ..하며 돈 없던 사위의  젊은 시절을 상기 시키곤 했었다. 비록 가난한 시대가 있었지만, 그리고 잘 살고 돈이 풍부한 시대가 되었지만, 진정한 사랑은 돈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진실을 늘 머금고 있다.

오히려 이 시대는 풍요 때문에 더욱 진실한 사랑에 굶주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 모른다. 때로 가족에게서, 때로 공동체로부터, 때로는 정부에게, 때로 남편에 대해서.. 허례와 허세로 인해 왜곡된 사랑은 진심을 담은 사랑을 분별하는 지식을 혼동케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안하고 의심 많은 청년 야곱에게 이렇게 신의 사랑을 프로포즈하고 계시다. 

“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세기28:15).” 

거짓 사랑은 언젠가 떠나도, 진리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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