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이니 연말 휴가로 느슨해진 시간에 널려진 집안 청소를 이곳 저곳 하게 되었다. 두 아들이 분가를 하고 나니 이리저리 뒹귈던 옷가지며, 신발이며, 군것질 봉지며, 운동 기구들도, 한결 단촐해졌고 둘(부부)이 사는 집은 사용 반경이 휠씬 줄어들었다.  TV를 보는 방과 내가 읽던 책들이 이곳 저곳 펼처 있는 곳을 제외 하고는 나에게 떠다 맡긴 청소 구역은 그다지 할 일이 없다.  슬금 정리한  흔적만 남기고 마무리를 하려는데  갑자기 차고에서 ‘악’하는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뛰어가 보니 아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고 쪽으로 손을 가리키며 말을 잘 잇지 못한다. 왜 그래? 하고 다시 물으니, 쥐, 쥐 하며 차고에 쥐가 죽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큰 일은 아니라는 안심이 되었지만 동시에,  죽은 쥐를 치워야하는 무거운 숙제가 바로 나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왠일인지 나는 어릴 때 부터 쥐가 싫었다. 남자의 알량한 자존심을 조금 유보하면 쥐가 끔찍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생긴 모양도 너무 징그럽고 털 색깔도 살아 움직이는 몸짓도 몸서리 치게  싫다. 죽은 쥐를 어디에 담아서 치울까 생각 하니 정말 난감했다. 

아이들이 분가 하기 전에는 둘째 애를 시켜 늘 이런 궂은 일은 쉽게 해결하곤 했는데 이제 내 밑에 기르는 개 두마리 외엔 미룰데가 없는 허접한 형편이 되었다. 어릴 때 홍수가 나면, 동네 한 가운데를 지나는 다리에 떠오른 쥐 꼬리를 잡아 공중에 빙빙 돌리며 장난을 치던 아이가 그 때는 동네의 많은 꼬마 추종자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다행히 쥐는 죽은 지 오래 됬는 지 박제처럼 말라있었다. 아직 살이 물컹하고 늘어져 있지 않으니 그다지 끔찍하지 않게,  복사 종이를 담았던 빈 박스와 와 쇠 부삽을 사용해 난제는 해결되었다. 그렇게 2020년 새해가 밝았다.

2020년은 쥐의 해, 경자년이란 이름표를 달고 우리에게 등장했지만 사실상, 새해로 온 오늘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날일 뿐이다. 12월 말일과 다름 없이 1월 1일은 새해로 등장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날을 기념하고 서로에게 소망의 복을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것이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부모와 형제와 가족들에게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지겨운 인생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왜 이렇게 인생이 길지?‘하고 푸념을 한다. 전화로 인사를 드리니 90을 바라보는 장모님은 “ 올해는 꼭 나 좀 데려 가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하며 사위에게 그저 웃기만 하기엔 마음이 무거운 응석을 부리신다. 기대감과 소망이 없다면 새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과 무거운 짐을 끌어야하는 버거운 나날의 연속일 뿐이다. 

젊을 때 호기로 새긴 문신을 언젠가 철이 들면 지우고 싶어하듯, 새해가 되면 새 출발을 위해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다. 하지만 아프고 슬플수록,  상처와 사무침이 깊을수록 그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많은 앳된 젊은 연예인들이 연말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있었다. 악플에 담겨 있는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사실에 그들은 절망한다. 나만 알고 가리고 싶은 비밀이 발가 벗겨지면서 그들은 숨을 곳이 없다. 새 날이 주어 지지만 그것이 다시금 과거를 반복하는 무거운 흑암의 시간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내와 주위 상황을 보면 얽혀진 타래를 어떻게 새해에 풀어 갈 수 있을 지 걱정이다. 세상에 눈을 돌리면 전쟁과 패권의 경쟁으로 2020년에 어떤 일이 일어 날 지 불안을 떨칠 수 없다. 

신은 영원으로 부터 하루를 우리에게 토해 놓는다는 현자들의 격언이 있다. 새 날은 세상의 때가 뭍지 않은 영원에 속한 신선한 하루로 주어진다는 말이다. 나의 형편과 상관없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새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백의 스케치북과 같다.  그러므로, 새 날은 내가 망처 논 과거의 연장이 아니다. 
고대, ‘눈물의 선지자’로 불렸던 슬픔 많은 에레미야는 감옥에도 갖히고, 민족의 멸망을 바라보며 타민족에게 포로로 잡혀 가는 절망을 날마다 겪었지만 이렇게 고백했다. 
“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 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에레미야 애가3:22-23). “    

비록 변변치 못한 과거가 있더라도, 세상과 달리, 
신은 그 분께 속한 영원의 보따리로 부터 우리에게 또 새 날을 선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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