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죽극장 일대 풍경

나는 김천 촌놈이었고 다섯 살 위인 형은 대한민국 제3의 도시 대구사람이었다. 형제는 성장지가 달랐다. 형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한글을 스스로 깨치고 신문에 나와 있는 쉬운 한자까지 읽을 줄 아는 신동이었고, 나는 공부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린 적이 없는 범재였다.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장남은 우리가 키우지 않더라도 앞길을 열어주기로 하자고. 대구에서 살고 계신 할머니는 슬하의 1남 5녀를 다 출가시키고 혼자 살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동네방네 소문난 술고래여서 일찍 돌아가셨다.) 

형은 초등학교 입학을 대구에 가서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사랑스런 손자가 오니 밥해 주는 일이 즐겁기만 했으리라. 찬거리를 동네에서 해결하던 할머니는 멀리 칠성시장까지 가서 사와도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12년 동안이나 큰손자를 키웠다. 그 큰손자가 대학에 합격해 서울로 떠나는 날, 할머니는 마당에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중학교마다 시험을 치고 들어가던 시절, 소위 ‘1류’ 초등학교에 다녀야지 1류 중학교를 갈 수 있었다. 형은 방심하여 문제 2개 정도를 오답을 썼고 커트라인을 넘지 못해 경북중학교는 떨어지고 2차인 대구중학교에 갔다. 하지만 중학교 3년 내내 공부를 열심히 해 경북의 수재들만 들어간다는 경북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들어가서도 반에서 1, 2등을 다투는 실력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효자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는 반에서 3등 정도 했지만 중학교에 가서는 공부보다는 소설책 같은 것을 즐겨 읽고 국어선생님의 인도로 백일장에 쫓아다니며 공부는 뒷전이라 부모님을 꾸준히 실망시키는, 형의 반도 미치지 못하는 자식이었다.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우리 속담이 맞다. 

고등학생인 형은 부모형제와 떨어져 말이 안 통하는 일자무식 할머니 밑에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살아가게 되었으니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형은 문학과 철학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고, 시내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80년대의 한일극장

나는 방학이 되면 꼭 대구 할머니 댁에 놀러갔고, 형과 며칠 혹은 몇 주를 함께 지내다가 김천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작은손자를 듬뿍 사랑해주셨고, 형도 몇 달 만에 만난 동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시내에 데리고 가 영화를 보여주곤 했다. 방학 때 대구에 가서 형이 보여주는 영화를 본다는 것, 그것은 촌놈인 내가 누리를 커다란 호사였다. 대구에는 좋은 극장이 많이 있었다. 

할머니 댁은 북구 칠성동 2가 33번지였다. 대구역에서 굴다리를 거쳐 종합운동장을 지나쳐 가면 대한방직이라는 큰 공장이 나오고, 그 건너편이 칠성동이었다. 할머니는 방 두 개를 세놓고 사셨는데 대체로 대한방직에 나가는 여공들이었다. 칠성동은 가구 수가 아주 많았다.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도 계속 집이 나오는 대구 특유의 동네였다. 할머니 댁은 큰길가에 있어서 버스 타러 가기는 편했다. 극장에 가는 날은 버스를 타기도 했지만 걸어서 가도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만경관, 한일극장, 제일극장, 아카데미극장, 대구극장, ‘재개봉관’인 자유극장과 송죽극장……. 재개봉관이란, 개봉관에서 끝난 영화를 다시 상영해 주는 곳으로, ‘아 그 영화 못 봤는데 끝나버렸나 봐’ 하고 안타까워할 때 다시 해주기 때문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볼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필름이 약간 낡아 있었고, 값도 좀 쌌다. 

조선인 자본으로 세워진 대구 최초의 극장은 만경관이라고 한다. 1922년 함경도 출신 이재필이 중구 향촌동에 세운 만경관이 종로로 옮겨 간 시기는 1930년대다. 만경관이 세워진 이후 향촌동을 중심으로 하는 원 도심에 1세대 극장 골목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에 대구좌(후에 대구극장이 됨)와 신흥관(후에 송죽극장이 됨)이, 1930년대에 호락관(이후 나이트클럽 초원의 집이 됨)과 영락관(후에 자유극장이 됨)이 들어섰다.

2세대 극장 골목은 동성로와 중앙로 쪽이다. 1938년 동성로에 세워진 대구키네마구락부는 한국전쟁 때 무너진 서울 국립중앙극장 대신 3년간 국립중앙극장으로 쓰이다가 1957년 개인에게 인수돼 한일극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동성로의 한일극장은 대구의 대표적인 극장이 되었다. 1958년 제일극장이 동성로에, 1961년 아카데미극장이 중앙로에, 1997년 대구 최초의 복합상영관 중앙시네마가 중앙로에 들어섰다. 아무튼 당시 개봉관으로는 중앙로를 사이에 두고 동성로 쪽으로는 한일ㆍ제일ㆍ아카데미ㆍ대구극장이 있었고, 북성로 쪽으로는 만경관과 아세아극장이 있었다.

나는 형과 함께 <안네의 일기>나 <독수리 요새> <샤이안> <대탈주> <사상최대의 작전> <패튼 대전차군단> 같은 영화를 봤다. 아버지도 영화를 좋아하여 3부자가 함께 서부극을 본 적도 있었다. 존 웨인 주연의 <치삼>이라는 영화였다. 

형은 공부를 계속 잘해 서울대학교에서 커트라인이 제일 높은 법과대학 법학과에 들어갔는데 나는 시험을 치고 들어간 김천고등학교를 2개월 재학으로 중퇴하고 허랑방탕하게 살아갔다. 형의 하숙집에 더부살이를 할 때도 같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나 <콰이강의 다리> <닥터 지바고> 같은 영화를 봤다.

제일 잊히지 않는 극장은 자유극장과 송죽극장이다. 값이 좀 싼 영화관이었고, 지나간 영화 중에서도 흥행 성공작을 엄선(?)하여 상영함으로써 형제가 보기에는 딱 좋은 극장이었다. ‘낮달’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분이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이분이 본 영화가 내가 본 영화랑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랑 동년배일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고등학교를 다니던 형이 데려간 그 극장에서 내가 본 영화는 리처드 버튼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독수리 요새>였다. 열네 살짜리 시골소년이 얼마나 영화에 몰입해 있었던가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화장실에 들렀을 때 세면대 앞에서 고의춤을 깠을 정도였다. 아카데미극장에선 ‘문화교실’로 <샤이안>을 관람했다. 문화교실은 그 무렵 중등학교에서 두어 달에 한 번씩 시행하던, 유명 영화를 단체 할인요금으로 관람하는 제도였다. 영화에 목말라 있던 어린 학생들은, 자리가 없어 대부분 선 채로 영화를 봐야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김천에는 아카데미극장과 김천극장이 있었는데 ‘문화교실’로 많은 영화를 봤다. 제일 많이 본 영화가 서부극과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리고 <로마제국의 멸망> 같은 서양 사극이었다. 형과 함께 갔던 자유극장과 송죽극장은 양키시장에서 향촌동으로 가는 길목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경쟁을 하는 극장이었던 것이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두 주인은 아마도 영화 선정에 상당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재개봉관은 이 두 극장 외에도 동쪽의 중앙ㆍ신성ㆍ신도극장, 남쪽의 대한ㆍ대도극장, 서쪽의 동아극장이 있었다고 위에 인용한 글을 쓴 이는 회고하고 있었다. 비가 줄줄 흐르는 필름을 돌리는 3류 극장도 있었다. 칠성동의 칠성극장, 달성동의 달성극장, 내당동의 미도ㆍ남도극장, 비산동의 오스카극장 같은 극장이었다. 형은 그래도 이런 극장에는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 

새롭게 단장한 만경관의 내부

어느 해였던가. 방학 때 내가 대구에 머무는 동안 내가 볼 만한 영화는 하지 않았는데 방학이 끝나버려 김천에 갈 날이 되었다. 김천 가기 전날 밤에 내가 오래도록 울자 할머니와 형이 날 달래려고 한참 동안 애를 썼다. 영화를 한 편도 못 보고 김천으로 가게 되어 나로서는 아주 슬픈 방학이 되고 말았다. 

형은 그 당시, 대학 입시 준비에 피치를 올려야 할 고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개봉하는 외국영화는 거의 다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해 동안 본 영화를 대상으로 스스로 작품상ㆍ감독상ㆍ남우주연상ㆍ여우주연상ㆍ남우조연상ㆍ여우조연상ㆍ각본상ㆍ각색상ㆍ촬영상ㆍ음악상 등을 선정하고 있었다. 중학생인 나는 형이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상작을 선정하는 것을 보고는 김천에 돌아가 자그마한 흑백텔레비전에서 해주는 ‘주말의 명화’를 본 후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영화들을 대상으로 나도 상을 선정해 연말에 형에게 자랑삼아 보여주었다. 철없는 중학생 때도 형은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내 할머니도 부모님도 돌아가신 지 오래되었다. 고모님 중 세 분이 돌아가셨다. 그래서 대구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부모님 묘소는 경북 칠곡의 선산에 있다. 하지만 지금도 대구사람을 만나 대구 사투리를 들으면 저절로 그때 일들이 떠오른다. 칠성동, 굴다리, 칠성시장, 중앙로(대구사람들은 중앙통이라고 부른다), 송죽극장, 자유극장……. 모두 다 내 추억 속에 남아 있는 그리운 곳이다.

〈편집자 주(註)〉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한국이 매우 혼란스럽고 특히 대구.경북 지방은 확진자가 많아 큰 고통을 받고 있다. 하루빨리 사태가 완화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의 ‘대구와의 인연’에 대한 글을 게재했다. 이 시인은 2월초 시드니에서 열린 4회 문예창작아카데미에 박덕규 교수와 함께 강사로 참여했다. 이승하 시인의 허락을 받아 글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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