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몇 시간 뒤면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통일에 대한 기대감 부푼 뉴스가 아침부터 풍성하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단단히 꽂고 자리에 앉는다. 
캐나다 항공에 보낼 소금, 후추 병들이 테이블 위에서 내 손 길을 기다리고 있다. 짝을 맞추어 나란히 줄지어 있는 폼이 출정을 앞 둔 꼬마 병정들 같다. 이어폰을 통해 들리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문재인, 김정은, 판문점 어쩌고 하는 소리에 내 귀도 커지고 있는데 청각을 방해하는 무엇이 어른거린다.
“Not...... once......”
닉이 저만치서 손짓 발짓을 하며 뭐라고 떠들고 있다. 황급히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일어선다. 내 귀에서 판문점이 아스라이 사라져간다.

닉은 창고담당 매니저다. 조금 전 내게 아침인사를 했는데 내가 그걸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며 화를 내고 있다. 명색이 ‘러블리 코리언 걸’인 내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자 닉은 자기 말이 맞는다며 핏대를 세운다. 게다가 이것이 오늘만의 일이 아니고 이미 여러 날 그래 왔다는 것이다.
떠드는 소리에 호기심을 안고 기웃거리는 사이먼까지 불러 들여 내게 '확인사살'을 감행한다. 오늘은 남북 정상회담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으니 닉의 인사를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다. 혹시 그랬다 해도 닉이 생각하는 것처럼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기에 난감하다. 무엇인가에 집중하면 주변을 보지 못해 실수가 잦은 편인 나다. 어쨌든 예고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는 피하고 볼 일이다.
“노, 노 앱소루틀리 노.  아 엠 쏘리... 리얼리 쏘리,.. 아이 네버 이그노어드 유.”
목소리에 아양까지 얹어 사과의 뜻을 전해보지만 닉은 그대로 손사래를 치며 뒤돌아선다. 평소 가졌던 괘씸죄가 크게 작용한 모양이다. 월요일 아침부터 느닷없이 맞은 소나기가 어이없어 내 속도 꼬인다.
공연히 애꿎은 후추 병에 힘을 주었더니 맵고 아린 맛이 훅 ~ 콧속을 뒤집는다. 연거푸 재채기를 해대자 눈까지 아려온다. 그러고 보니 소금, 후추 병은 언제나 나란히 짝을 이루고 있다. 짜고 맵고, 하얗고 검고, 서로 다른 맛과 색이 섞여 짝을 이루고 사는 것이 사람사는 세상이란 말인가.
 
‘그래, 매운맛과 짠맛이 만나 재채기를 만드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닉이 몰라 저러지.’ 

별별 개연성 없는 감정들이 뒤섞여 머릿속이 후줄근해지고 있는데, 장애우 직원 쿠앙의 끼룩거리는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린다.
“하 와 야, 코리안 걸!  굳 모닝! 코리언 걸! 치카 치카 코리안 걸!”
언제나처럼 쿠앙의 인사는 요란하다. 틈을 주지 않고 들어오는 그의 거칠고 메마른 악수 손을 나는 잡는 둥 마는 둥 내려놓고는 방긋 인사해 준다. 
“굳 모닝! 쿠앙~”
쿠앙에게 내 이름은 '코리언 걸'이다. 그는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내 그림자만 보여도 '코리언 걸'을 외쳐댄다. 덕분에 회사에서 내가 코리언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쿠앙의 코리언 사랑은 ‘걸 그룹’에서 시작된 듯하다. 어디에서 보았는지 엉덩이를 뒤로 빼고는 두 팔을 허수아비처럼 치켜들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걸 그룹 흉내를 내곤 한다.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대고 과장되게 립스틱 바르는 척을 한다거나, 바지를 걷어 올리고는 머쓱하게 웃을 때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따로 없다. 그는 몇 개 안 되는 단어를 반복하면서 온 몸을 비틀어 말하지만 표정만큼은 누구보다도 신나고 풍부하다.

몸이 너무 말라 막대인형 같은 쿠앙을 처음 본 건 회사 근처 전철역 카페에서였다. 수첩을 보면서 두 개의 배달용 커피 잔 뚜껑에 매직으로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이름을 베끼는 것이었는데 힘을 너무 주어 끝이 뭉툭해진 글자는 상형문자처럼 보였다. 스펠링 한 자 한 자를 새기듯 쓰고는 컵을 들고 바삐 일어나 회사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커피 두 잔 중 하나는 쿠앙 것일 테고, 나머지 한 잔은 누구의 것인지 궁금해 하며 그의 잰 걸음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커피 잔의 주인공은 장애우를 관리하는 사회복지사 제시카였다. 커피 심부름은 제시카가 쿠앙을 관리하는 방법 중 하나였던 것이다. 글자 공부까지 해야 하는 그 일이 꽤 힘들었을 텐데 그는 무척 즐거워하며 열심히 해냈다. 제시카가 근무지를 옮기면서 커피 배달은 끝이 났지만, 쿠앙의 아침은 여전히 분주했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에게서 종종 한 송이 꽃을 배달 받기 시작한 것이.
쿠앙은 출근길에 길가에서 꽃을 꺾어오곤 했다. 봉투에 담아 고이 들고 온 꽃은 우리들 중 누군가의 머리에 얹어져 하루를 향기롭게 했다. 나와 동료들은 그 꽃이 누구의 머리에 꽂힐 것인가를 은근히 즐기며 기다렸다. 꽃의 대부분은 코리언 걸인 내 머리에 꽂혀졌다. 어쩌면 쿠앙의 눈에는 오십이 넘은 내가 걸 그룹 멤버처럼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오늘따라 ‘코리언 걸~코 리 언~레~터~’를 외치는 쿠앙의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발음이 더 뒤틀린다. 그의 말머리를 잡아보려고 귀를 바싹 대는데 그는 접은 종이쪽지 하나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 매일 쉬지 않고 글자 쓰기 연습을 하던 쿠앙이 드디어 연애편지라도 썼나 싶어 얼른 열어본다. 그런데 펼친 종이에는 한국말이 빼곡하다.
‘고려해 보십시오!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도박은 늘어 가는데 즐거움은 줄어듭니까?’
단도박협회에서 배포한 경고문이다. TAB 거치대에 꽂혀 있던 전단지에 한국말이 있어 일부러 가져온 모양이다. 쿠앙은 언제 어떻게 한국어 글자를 알았을까. 기대했던 연서는 아니지만 머리가 환해지면서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쿠앙의 코리언 사랑과 관심에 인생이 다시 달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뭉쳤던 감정 근육도 느슨하게 풀어진다. 
'그래, 우린 모두 외로운 중생들이지......'
퇴근 무렵, 나는 일부러 창고로 가서 닉의 코에 눈을 바싹 들이대고는 먼저 인사를 한다. 
“굳 애프터 눈~ 닉! 해브어 굳 이브닝~닉!”
코리언 걸의 말투에 단맛이 넘친다. 입가에 헤엄치듯 지나는 닉의 미소 꼬리가 길게 늘어난다. 

 ‘그래, 가끔은 테이블에 쓴 커피를위해 설탕 병이 추가 되는 게 인생인 게야.’ 

*Disability  Services Australia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시리즈 중 4번째 이야기.

유 금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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