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길

우연한 기회에 니체의 ‘선악의 피안’을 읽기 시작하다가 들레즈의 ‘천의 고원’을 우회해서 나찌 전력이 있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까지 왔다. 현대철학은 물론 현재 인류가 뭔 짓거릴 하고 있는지 감을 잡고 싶은 사람이라면 니체와 하이데거를 읽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최근 나의 생각이다. 또한 인류의 미래는 하이데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는 가에 달려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왜 하이데거인가?  서구 철학 담론에 있어서 하이데거가 소위 코페르니쿠적 사고의 전환을 마련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이 그렇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의 본질은 무, nothingness 이다. 그리고 바로 그 '없음'을 통해서 '있음'이 나타난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말이다. 하이데거는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da sein 이란 신조어를 만든다.  번역하면 '거기에 있음' 이다. '거기'란 시공을 갖고 있는 이 세계(일종의 수영장)이고, '있음'이란 이 세계라는 미디엄 (풀장) 안에 던져져서 살기 위해 죽어라 헤엄치는 또는 살아 남기 위해 부단히 'busi - ness'  상태에 있어야 하는 아주 피곤하고, 모호하고, 자기모순적이며, 신비로운 존재인 ‘사람’을 일컫는다. 쉽게 표현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역사와 세계라는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의 거미줄에 걸린 파리와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존재 이론은 공상 과학영화 ‘메이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 메이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프로그래머)는 어느날 뫼피우스를 만난다. 네오는 그로부터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가 사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만들어진 가상세계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뫼피우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있는 네오 앞에 2개의 정제약을 놓는다.  빨간약과 파란약이다.  빨간약을 먹으면 현실로 믿고 있는 가상세계가 해체되고 진짜 현실세계로 안내된다. 잠시 고민하다가 네오는 빨간약을 선택한다. 잠시 후 그에게 나타난 세상은 충격 그 자체이다.  핵전쟁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세상이 나타난다. 인류는 핵전쟁으로 멸망했던 것이다. 그것 뿐이 아니다. 최후의 승리는 인공지능에게로 돌아간 모양이다.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통제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시험관 속에서 클로닝되어 에너지 원을 공급하는 자원으로 전락해 있었다. 에너지 원으로 전락한 인류의 비참한 모습은 바로 하이데거가 현대 과학기술과 관련한 몇 편의 에세이에서 경고한 바 그대로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과학기술이 자연과 인간을 ‘standing reserve’로 전화시켜 버렸다고 경고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사실 이런 메이트릭스 또는 미디엄의 역사이다.  고대는 고대의 미디엄 , 중세는 중세의 미디엄, 그리고 현대는 현대의 미디엄을 갖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바로 이 미디엄이 주체가 된다. 미디엄이 창조하고 주체가 되어 끌고가는 역사이다.  돌을 빠개서 연장을 만들고 마찰을 통해 불을 얻었던 구석기 시대의 세계관과 후기 현대를 통과하는 현대인의 세계관이 같을 수 없듯이 그 미디엄의 영향은 인간 존재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교, 사상, 문학, 예술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시대가 되었든지 예술 작품은 미디엄의 예술혼이 활동한 결과이며 예술가는 단지 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술가는 무당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신접한 무당이야말로 이러한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당은 자신 마음대로 무당이 되거나 싫다고 폐업할 수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영화 메이트릭스에는 무당이 등장하고 또한 네오는 이 무당에 의해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메시야로서의 인증 절차를 밟는다.) 하이데거는 기술과학으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술에서 찾고 있다. 많은 이단 종파들이 종교를 예술과 접목하면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까.

호주는 산불로 인해서 많은 동식물 군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양봉에 이용되는 꿀벌의 절반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판단이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소실되거나 잃은 것이 없다.  손해 봐야 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지구가 펄펄 끓는 가마솥 같은 마그마 상태에 있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무엇이 있었던가?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불덩어리 밖에는. 인식 주체도 인식 대상도 없는 순수한 nothingness 였다. 자연을 언제나 가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만 보는 테크노-로고스가 우리에게 준 관점일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생명체와 무기물의 중간체인 바이러스 역시 자연이다. 그러나 강이나 매장된 석유처럼 가용 가능한 자원이 아니다. (물론 백신 제조업체에게는 바이러스가 자원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중국 정부는 이 바이러스가 과거 사스와 달리 피감염자가 증상을 보이지 않은 채 병균을 전파할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바이러스가 '생각'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다. 바이러스와 현대 의학은 서로 경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백신을 만든다고 해도 다음에 출현할 변종 바이러스는 그 백신을 뛰어넘는 '기술'을 갖추고 나타난다. 

자연의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된 듯 하다. 뉴질랜드의 화산 폭발, 호주의 산불, 중국 발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닌 것이다. 고삐 풀린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탐욕과 착취에 강력한 브레이크가 걸린 것 같다.  중국의 수십개 대도시가 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유령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10차선이 넘는 대도로에 한 두대 차량과 자전거만 보인다.  대부분의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출근하지 못한다. 호주도 많은 학교들이 휴교로 들어갔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반격으로 무한 생산과 소비라는 거대한 기계가 그 미친듯한 작동을 멈춰버렸다. 테크노시티의 활동이 중단되면 시인과 예술가의 활동이 시작되는 시간이 온다. 그것은 긴 안식일일 수 있다. 그 안식일은 인류의 구원과 관련이 있는 지도 모른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강요된 안식일?  이러한 사태를 들여다 보면서 하이데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언자처럼 그는 이미 서구문명의 몰락을 바로 그 책에서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일로 인해서 인류는 대 변혁 바로 직전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이 사회구조의 변화이든 의식의 구원이든 모종의 변화가 임박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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