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면 절간과 같다고 했다. 시드니가 그와 같다. 모두가 집안에서 안거 중이다. 불가에선 일년에 두차례의 안거가 있다. 여름엔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겨울엔 10월 15일부터 1월 15일까지 각각 3개월이다. 

출입을 통제하고 하루 10시간이나 12 시간씩 4차례 나누워서 용맹 정진을 한다. 이른바 면벽관심(面壁觀心)이다. 밖으로 향하며 늘 헐떡거리는 마음을 거둬 들여서 자신의 생각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어떤 대상에 재미를 붙이면 시간은 잘 가고 재미있는 듯이 느껴지지만 끝나고 나면 허전하다. 생각이 두개로 흐트러지기에 그렇다. 그 무엇이건 나눠지면 힘이 없다. 하나가 되어야 안정이 되고 그 속에서 희망과 평화를 엿보게 된다.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안거의 행태와 내용은 비슷하다. 생사의 문제로부터 파생되는 불안함이 그 안에 공존한다. 다름은 승가에선 자발적 통제를 택한 것이지만 속가에선 피동적 강압으로 인한 자가격리다. 무슨 일이건 스스로가 좋아해서 하는 것은 신바람이 나지만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게 되면 짜증이 생긴다. 이 기회에 한번쯤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반조(返照)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그것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우린 너무 함부로 살아온 부분이 없지 않다. 욕심을 따라 부나비처럼 쫓아 다녔고 자연의 조화를 허물어 뜨렸으며 타자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를 놀라운 발전이란 페인트로 색칠해 버렸다. 그런 오만함과 허세의 기운을 꺾어 버릴려고 그 악성 바이러스가 출현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또한 불안과 불편을 주는 그 핵심엔 생사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 용어가 듣기 싫든 좋든 간에 현실적인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럴 바엔 막연하게 피하려고하기 보단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수용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것도 상당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선승(禪僧)들은 그러한 생사의 불안에서 벗어나서 영원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주야로 정진한다. 그것은 불안 심리를 찬찬이 들여다 보는 자기 시간을 많이 갖는데서 생긴다. 자기 마음이 허둥대며 돌아다니는 내용을 잘 들여다 보면 때론 우습기도 하고 자신이 초라해질 때도 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이 많아야 안정이 되고 발전이 있다. 그런 시간을 외면하고 남의 나라 확진자 수만 헤아리게 되면 불안만 더해지고 갑갑함은 곱으로 늘어난다. 

코로나는 그런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기세가 등등하게 설치고 다닌다. 또한 이번 기회에 평소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했고 모든 순환적 유통됨이 얼마나 편안함을 제공했는지에 대한 감사함을 절감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되겠다. 
그 옛날 평생을 면벽하며 참선을 한 고승이 있었다. 어느날 젊은 선객이 찾아가서 “큰스님, 참 도가 어떤 것입니까?”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밥 먹는 것이니라.” 
“그게 무슨 대도(大道)입니까?” 
“나갈 땐 나가고 들어올 땐 들어오는 것이니라.” 

우린 지금 매우 불편하고 부자유스럽다. 그리고 마음은 불안하다. 유통이 되지 않고 주머니가 텅텅비니 어쩔  수 없다. 평소에 자기만 최고인 양 거들먹 거리고 돌아다닌 우리들, 생사의 무상함이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되어 어떻게 끝나는지도 모르면서 교만을 떨며 살아온 민초들의 방만했던 일상. 그런 만물의 영장이 미세 바이러스에 쩔쩔매는 모습을 바라 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텅텅 빈 시내 곳곳을 기웃거리며 돌아 다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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