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작데이(Anzac Day, 4월 25일)는 호주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국경일이다. 한국의 현충일에 해당한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시가행진을 하지 않았다. 참전용사들 대부분이 노인들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 노병들은 약 1만4천600명이 생존해 있는데 대부분 95세 이상이다. 2차 대전 이후 75년 지속된 퍼레이드가 올해는 없었다. 

잘 알려진대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노인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또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 등으로 올해는 아쉽지만 시가행진이 생략됐다. 연방과 주정부 단위의 간소한 기념식(새벽 추모식, 헌화 행사 포함)만 열렸다. 

4월 30일(목) 오전을 기준으로 호주의 확진자는 6,753명이다. 신규 확진자가 27일 7명, 28일 10명, 29일 13명 증가에 그쳤다. 뉴질랜드만큼은 아니지만 호주의 감염 억제는 매우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사망자는 91명으로 계속 늘고 있다. 거의 대부분 노인들이 희생되고 있다. 주별 확진자와 사망자는 NSW 3,016명(사망자 40명), 빅토리아 1,361명(18명), 퀸즐랜드 1,034명(6명), 서호주 551명(8명), 남호주 438명(4명), 타즈마니아 219명(12명), ACT 106명(3명), 노던테토리준주 28명(0) 순이다. 

노던테리토리준주는 한 달 동안 28명에 정체돼 사실상 완전 감염 차단에 성공한 셈이다. 사망자도 한 명도 없다. 호주 원주민들이 많은 이 준주는 바이러스 취약층인 점에서 보건당국에 매우 긴장했었지만 다행히 지역사회 감염을 잘 억제한 것으로 보인다. 
 
호주는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이 되면서 특히 겨울철에 북반구의 북미나 유럽처럼 대유행 사태가 생기지 않을지 걱정이다. 

수도 캔버라에 있는 호주전쟁박물관에는 현재까지 호주인 전사자가 10만 2천여명으로 집계됐다. 1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6만명이 넘고 2차 세계대전 사망자는 3만9천여명이다. 당시 호주 인구 7백만명과 비교하면 연합국 중에 호주 사망자 비율이 가장 높았다. 

시드니 남부의 간선도로인 프린세스 하이웨이를 달려 약  2신간정도 가면 ‘베리(Berry)’라는 지역에 도착한다. 15분 거리에 유명한 세븐마일 비치(Seven Mile Beach)가 있다. 

이곳에 1차 세계대전 당시 1,600여명이 살고 있는 해변 동네의 참전자가 220명이었고 귀국을 하지 못한채 외국 땅에 뭍여진 호주군 참전용사들이 54명이라고 한다. 안작데이가 유래된 갈리폴리 상륙 전투(터키)를 포함한 1차 세계대전의 참혹상을 짐작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시작된 날이 1914년 7월 28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국이 흑해(Black Sea)를 통해 러시아군대가 내려오도록 길을 만들기 위해 적국인 터키(오토만 제국) 영토인 ‘갈리폴리 반도’를 석권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영국(영연방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군 포함)과 프랑스 군대 수십만이 이곳에 모여 전투를 했지만 독일의 신무기인 기관총 부대와 막강한 오토만 터키의 강력한 저항으로 상륙전은 결국 성공하지 못 했다. 전투는 소강상태에 빠져 상당 기간을 끌었다. 이때 호주와 뉴질랜드 연합군(Anzac)부대 1만5천명이 새로 이 격전지에 투입되면서 이들을 상륙시켜 적과 대항했다. 

1915년 4월 25일 아침 4시경. 잘 훈련 되지 못한 상태의 안작부대원들은 인해전술로 진격을 했다가 일시에 4천여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을 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당시 종군 기자가 쓴 신문 기사는 “총알에 맞은 18세 청년들은 몇 바퀴 돌면서 쓰러졌다. 잠시 후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튀어나왔고 살려달라는 부상병의 소리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지옥이었다”라고 전했다. 

지금도 이른 새벽 4시 안작데이 추모식 때 ‘전몰 장병들의 뜨거운 피’를 기념하기 위해 ‘진혼나팔’을 울린다. 그 당시는 탱크가 없어서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사망자가 대략 6만명이라고 하지만 전쟁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까지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더욱이 당시 유행한 스페인 독감(사실은 미국부터 시작했다)으로인해 5천만명이 사망했다. 호주군에서도 많은 군인들이  죽어갔지만 숫자 파악이 안됐다. 생존 참전용사들이 1919년에 귀국해 5백만 호주 인구에게 스페인 독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약 40%의 인구가 감염됐고 사망자가 1만2천여명에 달했다.  

그때 실천한 행동이 지금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안 쓰고 외출하면 큰 벌금 부과), 고령자 격리 등이었다 손자손녀들이 조부모를 만나려면 유리창문을 가운데 두고 인사를 나두도록 했다. 

이런 많은 피를 흘린 안작데이를 계기로 영국인들이 호주와 뉴질랜드인들을 깔보던 전통이 많이 사라졌다. 또 두 나라에서 동족 의식, 민족 동질감이 싹트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안작 부대에서 시작한 호주의 애국심이란 첫째 가정을 사랑 하는 것(love your family), 둘째는 지역사회(동네)를 사랑하는 것(love your community), 셋째 국가를 사랑하는 것 (love your country)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돕고,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평등사회(egalitarianism)를 구성하는 것과 우정(mateship, 친구 사랑)이다. 

열악한 자연환경에 노출된 호주인들은 가뭄, 홍수, 산불이 발생하면 서로 돕는다. 근래 퀸즐랜드 중환자실에서 전염을 각오하면서 환자를 간호했던 간호사들도 아프가니스탄에서 병원에 근무하면서 안작정신인 애국심을 배운 간호사, 의사들이 였다고 한다. 영국, 미국의 전쟁에 동참해서 많은 희생자를 낸만큼 전승국의 혜택도 많이 누렸다. 이 넓은 호주 대륙, 대양과 남극 등 이권에서 호주는 참전용사들이 흘린 피의 대가를 많이 누리는 나라다. 그러나 일부 젊은이들은 ‘그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나?(What can we learn from them?)’라는 질문을 하면서 반항하기도 한다.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