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수요일, 미루고 미루던 뒷마당 청소를 시작했다. 1년 이상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던 야외 의자들과 테이블을 소독약과 비누를 동원하여 씻고, 가을의 깨끗한 햇볕 아래 뉘어 놓았다. 잔디를 깎고 잡초를 뽑고, 제초제를 뿌렸다. 그렇게 4시간이 지나갔다. 그 동안 난 전자책으로 나온 소설도 듣고 있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 미루던 청소를 하게 된 이유도 이 책 때문이고, 긴 시간 동안 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책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차를 몰고 가던 한 남자가 눈이 멀어 백색 맹인이 된다. 안과의사가 진찰해 봤지만, 전혀 이상이 없었다. 그냥 갑자기 원인도 모르게 장님이 되었다. 

문제는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전염성이었다. 결국 모든 시민이 다 장님이 된다. 도시는 무법천지가 되고, 인분으로 가득 찬 쓰레기장이 되어 버렸다. 인간이 세웠던 위대한 문명은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를 진찰하던 안과 의사와 그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이다. 안과 의사의 아내만은 눈이 멀지 않았다. 눈이 먼 남편이 수용소로 옮겨질 때 함께 따라가기 위해 눈이 멀었다고 속였다. 이 부인이 모든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와 인도자가 된다. 한 자루 총으로 음식물을 장악하고 여자들을 노리개 삼는 악당들, 수용소에 갇힌 장님들을 향해 마구 발포하던 군인들, 썩은 음식도 마다 않고 먹는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에서, 오물 덮인 땅을 더듬으며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난 이 소설을 보면서 그 동안 돌보지 않았던 내 뒷마당이 마음에 걸렸다. 그대로 놔뒀다 가는 ‘눈먼 자의 정원’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소독약까지 동원하여 깨끗이 닦았던 것이다. 그렇게 일하며 책을 듣는 중에 ‘눈먼 자들의 도시’가 끝났다. 잠시 밀어 놨던 까뮈의 ‘페스트’를 계속 들었고, 그 책도 끝냈다. 이 두 책들이 최근의 내 독서 리스트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선배들의 통찰력을 빌리고 싶었다. 알다시피 이번 금요일(5월 1일)이면 NSW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규정이 부분 완화된다. 록다운에 지쳐가고 있었던 시민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국가적으로도 호주와 뉴질랜드는 확진자가 현저하게 줄었고, 베트남은 종식 선언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현 위기 상황을 잘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 속으로 ‘페스트’ 끝부분에 등장하는 섬뜩한 경고가 비수처럼 날라 들었다. 페스트가 종식되고 사람들이 다시 거리와 술집으로 몰려 들 때였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다시 깨우고, 사람들을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2.
소설 ‘페스트’는 픽션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논픽션이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는 당시 유럽 인구 절반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다시 회복되기까지 300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중세를 지탱해오던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르네상스, 종교혁명, 계몽주의, 인본주의가 등장하며 인류문명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도 그에 버금간다고 봐야 한다. 지금처럼 전 세계 국경을 닫아 걸게 하고, 항공사들을 파산케 하며, 수조 억달러를 단시간에 풀어야 했던 때가 있었던가? 이런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도 건지는 교훈이 없다면 그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눈먼 자들의 도시’와 ‘페스트’의 끝은 해피엔딩이다. 눈먼 자들은 다시 눈을 뜨게 되고, ‘오랑’시에 닥쳤던 페스트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런 불행은 반드시 또 찾아온다. ‘페스트’같은 전염병은 물론,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픽션은 논픽션이 된다. 그 불행한 현실이 너무 잔혹하여 최후의 보루인 신을 찾겠지만, 그 신께서는 이전의 경고를 무시했던 인간들의 간구를 외면하실 수도 있다. 
‘눈먼 자들의 도시’ 끝 부분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안과 의사의 아내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전에 갔었던 지하 3층의 슈퍼마켓 식품 창고를 찾는다. 칠흑보다 더 어두운 그곳은 이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다투어 들어가려던 사람들이 넘어지고 막아져서 거대한 인간 무덤이 돼 버렸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끔찍한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비틀거리던 그녀는 잠시 쉬기 위해 길 건너편 성당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더 끔찍했다. 십자가에 못이 박힌 남자는 하얀 붕대로 눈을 가리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여자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칼이 꽂혀 있었다. 성상들의 눈은 하얀 천으로 묶여져 있었고, 성화 속 인물들의 눈에는 하얀 물감이 두텁게 칠해져 있었다. 성당을 숙소 삼아 머물던 사람들은, 여인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간다. 눈이 멀었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신의 저주를 피해서.

3.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은 끝날 것이지만, 이 불행을 교훈삼아 많은 것을 바꿔야 한다. 교육 시스템과 일터 현장, 그리고 경제 인프라는 이미 시작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시급한 개혁의 대상은 교회다. 세상을 책임지는 것이 교회라고 주장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번 사태를 통해서 교회 건물은 쓸모 없어졌고, 대규모 집회의 자랑은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위기는 기회다.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면, 재앙에 떠밀리어서라도 변해야 한다. 변화해야 할 때 변화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고기는 일본 근해에서 12월에 잡히는 참치다. 참치는 알에서 부화한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헤엄 친다. 참치에게 멈춤은 곧 죽음이다. 인간 역시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멈출 때 죽은 목숨이 된다. 
이번 한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보수는 궤멸했다. 그렇다고 진보가 영원하지는 않다. 그들 역시 보수가 된다. 보수는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고, 결국은 궤멸된다.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것, 즉 근본에로의 치달음이다. 그 근본에 도달하면 그 때 비로서 자유로워진다. 모든 부조리와 록다운에서 해방된다. 이제 묻는다. 당신은 날마다 변화하고 있는가? 변화하지 않는 ‘근원’을 향해 날마다 변화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 풍진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 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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