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작한 지 세달 째로 접어 들었다. 여름이 채 끝나기 전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 흔드는 초미의 뉴스가 등장하더니 어느새 가을의 끝자락인 5월이 되었다. 새벽엔 벌써 두꺼운 겨울 파카를 꺼내 입어야 그나마 한기를 달랠 수 있는 겨울 같은 가을이 되었다. 가을의 정취를 맡아 볼 여유도 없이 마치 계절이 순간 마술 같은 둔갑술을 부린 것 같다. 
한국은 지금 완연한 봄 일텐데..  진해의 화사한 벚꽃 놀이도 도망치는 탈주범처럼 행여, 누구라도 볼까 눈치를 살피며 없는 듯 지나고 제주도의 화려한 유채 꽃밭은 아예 트랙터를 갈아 엎어야 하는 진기한 일들도 있었다. 
코로나는 봄을 대변하는 계절의 낭만이 어디로 사라졌는 지 흔적도 찾을 수 없도록 꿀꺽 삼켜 버린 듯 하다. 영화나 TV에서 보던 유럽의 유명한 관광 도시들의 수려함도 무색하게, 이젠 건물만 즐비하고 사람없는 무기력한 공허함만 남겨져 있다. 언제가 될 지 기약 할 수 없는 세월 동안 만져지지 않고 냄새 맡을 수 없는 온라인에 매달린 가상의 것들로 대리 만족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많은 즐거움을 빼앗겨 버렸지만, 병들지 않고 생존 해야 하는 우선 순위에서 여지없는 선택인 셈이다. 코로나는 마치 살면서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 우선 순위를 정리해 보는 숙제를 내 주는 과외 선생 같다.

마치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이 살아 남기 위해 절박하게 먹을 것을 찾고 재미난 소일거리를 발견하면 황량함 가운데도 활기를 되찾 듯, 나는 요즘 개와 산책하는데 재미를 붙였다. 이 동네에서 십 수년을 살면서도 주변 공원에 한 두번 나가보는 게 전부였는데,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산으로 연결된 숲속 산책길을 발견하면서 부터이다. 겉으로는 주택가의 평범한 통행로를 따라 숲으로 연결되어 평소엔 그저 지나친 길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금새 신선한 숲의 공기가 숨결에 와닿고  마치 깊은 산 중에 와 있는 것처럼 새와 벌레 소리들이 들린다. 울퉁 불퉁 다듬어 지지 않은 산길을 따라가면 바위 틈새로 졸졸 흐르는 물을 만나고 그 길을 따라 이어진 다리도 건너야 한다. 평소에 간식 몇 개 던져 주고 주인 행세를 하다 모처럼 산책을 나오니 개는 흥분한 숨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산 길을 치닫는다. 한 시간 가량을 개를 앞세워 거의 끌려가다시피 가다보면 어느새 땀이 흐르고 다리는 뻐근해 진다. 산 길에 틈틈히 만나는 사람들도 멀찌감치 눈 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어색함이 있지만, 다른 시간을 젖혀 두고 거의 매일 지키는 새로운 생활 규칙이 되었다. 건강도 챙긴다는 득실에 앞서, 자연이 생색없이 제공하는 푸르른 나무들과 때묻지 않은 청정한 공기와 예상치 못한 산속의 청량한 소리에는 다른 것으로 대신 할 수 없는 신의 진심이 담겼다. 

아마 노아의 홍수 때에도 커다란 방주 속에서, 오랫동안 노아의 가족들은 감옥에 갖힌 죄수들처럼 매일을 보내기 위해 별의 별 소일 거리를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신의 의도에 따르려는 각별한 우선 순위가 있었다. 그리고 물이 말랐을 때, 새로운 세상을 목도 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에겐 새로운 세상을 계획하는 신적 우선 순위에 동승한 가치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인의 대명사인 노아는 홍수 이후에, 포도주를 거나히 마시고 취해 하체를 드러내고 잠들어 자식들을 민망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하나님만큼 높아지려고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가 갈갈이 흩어지는 불행한 사건이 생겼다. 시간 대의 차이는 있지만 방주 속과 홍수 이후의 시간을 대한 노아의 선택은 극단의 결과를 산출했다.       

그렇게 보면, 사회적 거리두기는 존재를 위한 가치기준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먼저, 중요한 가치를 방해하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간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 궂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신은 세상에 대해 너그럽다. 신은 요구하기 보다는 이미 많은 보물을 우리가 찾지 않은 곳곳에 숨겨 놓으셨다. 
   새로이 발견한 산책 길은 우선 순위를 새롭게 하는 신의 자비와 지혜로 가득 찬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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