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건너려다 하마터면 그의 발을 밟을 뻔했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깡통을 머리에 이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엉거주춤 엎드려 있는 남자의 발이다. 엉덩이는 바지가 벗겨져 골이 다 드러나 있다. 열 달은 씻지 않은 듯 보이는 발꿈치는 시커멓게 더께가 앉아 신발과 구별되지 않는다. 기묘한 자세로 땅바닥에 펼쳐진 신문을 읽는 척하다가 누군가 깡통에 동전을 넣으면 잠시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한다. 흘깃 그의 깡통을 보니 별로 소득이 없다. 그런 자세로 얼마나 있었을까? 종일 저런 자세로 있는 것이 구걸보다 더 힘들 거란 생각을 해본다.

어린 시절 늦은 아침이면 집에 오던 거지 할아버지가 있었다. 대문 앞에 서서 ‘아주머니~~’ 하고 부르던 낮고 탁한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가 오면 엄마는 소반에 밥을 차려 주었다. 우리가 먹던 식으로 밥과 찌개랑 김치 정도다. 마루 끝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코를 훌쩍이다가 덥수룩한 수염에 국물이 묻으면 소매 끝으로 닦아냈다. 밥을 다 먹고 나면 연신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그 시절 거지는 집에 구걸 하러 다니긴 했어도 전혀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지들이 밥 대신 돈을 요구하면서부터 조금은 공격적인 모습으로 바뀐 듯하다. 가끔 지하철을 타면 열차 안에서 종이쪽지를 한 바퀴 돌리는 걸인을 만날 때가 있다. 구구절절 어려운 사연을 적고 도와달라는 내용인데 돈을 주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종이를 코앞에 한 번 더 내밀어 은근히 압박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

호주에서 만나는 거지의 모습은 다양하다. 분명 거지의 행색으로 꾀죄죄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자유롭다. 구걸도 나름의 전략이 있는 듯하다. 어떤 거지는 여러 마리의 개를 데리고 시내 한복판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그가 앉는 자리는 지정된 듯 늘 한자리다. 여러 마리의 개를 키우려면 사료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구걸로 그게 다 감당이 되나 보다. 출근길 쇼핑센터 입구에서 보게 되는 걸인은 계단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는 일터나 학교로 가느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느긋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쩌다 지각하는 날 가쁜 숨을 쉬며 쇼핑센터 계단을 뛰어오르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묘한 열패감이 들곤 한다. 그는 여유 있게 모닝커피 한잔을 하고 있는데 나는 쫓기듯 그 앞을 지나쳐야 하기 때문이다. 커피 타임이 끝나면 다시 길에 앉아 구걸을 시작한다. 그에겐 직업인 듯 편안해 보인다.

가게에 가끔 오는 노숙자 손님이 있다. 그는 쇼핑센터 트롤리에 살림을 잔뜩 싣고 다닌다. 그도 역시 공원 근처에서 구걸 하며 노숙을 하느라 늘 악취에 절어있다. 어느 날 물통을 사며 돈을 내미는데 얼굴이 온통 땀범벅이고 손은 땟국에 절어 있어 땀을 닦으라고 수건을 준 일이 있다. 요긴하게 쓰였는지 다음날 물통을 몇 개 더 사면서 친구들에게 나눠 줄 거라며 물통 숫자만큼 수건을 달라고 했다. 살 때마다 끼워서 줄 수 있는 품목이 아니라고 설명을 하고 주었지만, 그로선 돈을 내고 물통을 샀으니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그 후로 가끔 가게에 와서 누구와 나눌 거라며 필요한 물건을 사곤 한다. 남루한 행색과는 다르게 늘 웃는 모습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습만 다를 뿐 사람 사는 일도 구걸에 가까운 면이 있다. 먹고사는 일이 대체 뭔지 자신의 감정 따윈 드러내지 못하고 직장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치사해도 꾹꾹 눌러가며 버티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옛날 같은 신분제도는 사라진 세상이지만 아직도 수직적인 구조에서 많은 사람이 갑과 을로 지내고 있다. 내 경우에도 마음이 내키진 않지만 억지웃음을 지어야 하는 때가 있다. 매상이 영 형편없어 이대로 마무리하게 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는 날이다. 그런 날엔 유난히 손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려고 아첨에 가까운 말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그가 고르는 물건이 최고인양 맞장구를 쳐준다. 자신의 실수로 물건을 파손해 놓고 애초에 하자가 있던 물건이라며 막무가내로 반환해 달라고 우기는 손님도 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며 손님의 이야기를 침착하게 들어준다. 손해인 거 뻔한데 동네 장사이다 보니 다음을 생각해서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다. 굳이 구걸이라고 표현하기엔 썩 적절치 않지만 사는 일이 무언가 얻고 채우기 위해 자신을 굽혀야 한다는 점에서 구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요즘은 유튜브 방송이 활발해지면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자기 영역을 드러내고 있다. 유익한 정보와 흥미 있는 소재로 인기를 얻어 돈을 벌고 유명해지는 사람이 많아졌다. 어제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이는 계좌 번호를 올려놓고 방송하면서 사람들이 쏘아주는 돈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런 행위가 인터넷 구걸이라는 말을 했다. 인터넷에서 흥행하는 사이버 머니인 별풍선이나 도토리를 구하는 행위도 구걸과 다르지 않다고 보면 너무 비약일까?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가장하여 구걸하는 신종 인터넷 거지가 생겼다고 한다. 길에 나서서 궁색한 모습을 드러내는 거지가 아날로그라면 이제 인터넷에서 구걸하는 디지털 거지를 보게 되는 세상이다. 
 
엉덩이를 쳐들고 있는 남자에게 말해주고 싶다. 조금 더 편한 자세로 고쳐 앉으세요. 그러다 영영 꼬부라져서 못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가 내게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너는 적선도 하지 않으면서 웬 참견인가? 


김미경  수필가
수필집 < 배틀한 맛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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