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기는 파도처럼 온다. 산불이 4개월 덮치더니, 갑자기 코로나바이러스가 쳐들어왔다. 반 년째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위기가 닥쳤다. 인종갈등으로 인한 위기다. 과연 지구촌 시대답다. 하루면 못 가는 곳이 없는 시대라, 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 순식간에 ‘팬데믹’이 된다. 인간문명은 후진 기어가 없는 자동차와 같다. 대양탐험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살아도 함께 살고, 죽으면 다 죽는다. 이 다음에 어떤 파도가 올지 두려운 가운데 궁금하다. 찰스 브론슨이 주연한 1968년 영화 ‘아듀 라미’에서 물컵에 동전을 넣은 게임이 나온다. 이미 물로 가득 채워진 유리잔에 동전을 넣는다. 하나, 괜찮다. 둘, 괜찮다. 셋, 넷, 그러다가 물이 넘친다. 지금이 그 때인가? 세상의 종말은 시작되었는가? 파도처럼 몰려오는 위기가 중첩되다가 결국 파국이 오는가? 

2.
현재 미국을 불태우고 있는 폭동의 시작은 5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부터다. 10일도 안됐는데 이미 전국 50개 주로 퍼져 나갔다. 거의 내전 수준이다. 주 방위군이 출동하고, 연방군대가 대기 중이다. 소말리아 내전에 출동했던 블랙호크가 미국의 수도 워싱턴 상공에 떠서 무시무시한 회오리 바람으로 시위대를 위협한다. 대통령은 잠깐 지하벙커로 피신하기도 했다. 시위대의 구성은 다양하다. 인류애로 뭉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 이익을 보려는 야심가도 있고, 약탈자들도 있다. 조지의 동생 테런스 플로이드가 “나는 분노해도 날뛰지 않고, 지역사회를 망치지 않는다. 약탈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 외쳐도 소용없다. 한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6월 3일(수) 현재, 필라델피아 50건, 미니애폴리스 10건, 아틀랜타 4건이다. 

미국은 원래 전쟁에 능한 나라다. 조국인 영국, 그리고 먼저 들어와 있었던 프랑스와 멕시코 심지어는 원주민과 싸우면서 거대한 땅을 독점했다. 특히 서부개척사는 총의 역사다. 지금도 개인의 총 소유는 헌법으로 보장하며, 어떤 주에서는 서부시대처럼 허리에 권총을 차고 다닌다. 시민 자위권도 있다. 수상한 자를 보면 권총으로 제압하거나 사살도 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시작되면서 총기 매출은 급격히 늘어났다.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은 결국 자기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3.
그렇게 미국은 현재 두 위기와 전쟁 중이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인종갈등으로 인한 폭동이다. 이번 폭동이 급격하게 전 세계로 번져 나가는 주 원인도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4일(목)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죽은 미국인은 106,180명. 물론 20세기 초 스페인독감으로 사망한 5천만명 보다는 아주 적다. 그러나 지금은 팬데믹이다. 전 세계가 세기말적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그 외 유럽국가들의 사망자는 영국 39,452. 이탈리아 33,452. 프랑스 28,943, 스페인 27,127명 순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380,250명이 죽었다. 서구문명의 몰락 신호인가? 이런 위기 상황이 되면 어차피 죽을 것, 몸부림 쳐보겠다는 사람들이 생긴다. 특히 흑인들이 그렇다. 미국 인구의 13%가 흑인인데, 코로나바이러스의 사망자 중 22%가 흑인이다. 모두가 나그네 이민자로 들어온 미 대륙에서 3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그들은 분노한다.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한 많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들이다. 계속 살아봐야 돌파구 없는 사회. 스스로 불나방 되어 위기의 불 속으로 뛰어든다. 

이렇게 파도처럼 계속 몰아 닥치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나는 외친다. “How Long? Why? 언제까지입니까?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게 하십니까?”

4.
지상 최고의 천국 호주는 아직 괜찮다. 코로나바이러스 진원지를 밝히라는 요구에 중국이 발끈하여 별 이상한 위협을 남발하지만, 아직 잘 버티고 있다. 6월 2일 시내에서는 인종차별 금지에 대한 시위를 벌였지만, 평화적으로 마쳤다. 난 그 전날 6월 1일에 시내로 나갔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이동 제한이 좀 풀렸고, 그날부터 주립미술관이 오픈한다해서 나갔다. 그 동안 집 주변만 왔다 갔다 했다. 병원가고, 마트 가고, 도보 운동만 하고 살았다. 
마지막으로 시내를 본 것은 3월 18일이었다. 이미 텅 비었었다. 인터내셔널 페리 터미널에는 거대한 크루즈 선이 정박해 있었고, 그 뒤로 3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배가 죽음의 배 ‘루비 프린세스’였다. 그 때부터 사망자가 막 늘어나더니 지금은 102명이 되었다. 이제 조금 제한을 풀며 오픈한 미술관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했다. 호젓하게 전시관을 돌아 보다가 호주의 대표적인 화가 아서 보이드(Arthur Boyd: 1920~1999)의 ‘The Mockers (조롱하는 자들)’를 다시 만났다. 1945년에 그린 그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룬 그가 당 시대를 풍자하여 그렸다. 오른쪽 위에는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가 있고, 가운데에는 히틀러를 의미하는 독재자가 왕관을 쓰고 왕위에 앉아 있다. 그 주변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난동을 부리며 예수를 조롱한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며?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와 세상을 구원해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이들의 조롱을 담담히 받아들이시며,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놔 두신다. 왜 그러시는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거짓과 선동, 모략과 폭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칼은 칼을 불러 올 뿐이다. 이 진리 앞에서 나는 좌절한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그 방법 밖에 없다고. 당신도 그렇게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고.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파도처럼 겹쳐오는 팬데믹 위기 속에서 난 이 진리 앞에 다시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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