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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지평 ‘수필’] 뜨거웠던 날은 가고
한호일보 | 승인 2020.06.25 14:03

타는 냄새가 났다. 또 불인가. 화들짝 놀라 뒷마당으로 뛰어나간다. 하늘은 맑고 바람이 부드럽다. 햇살은 반쯤 익은 레몬 나무 위에서 반짝이고 담장 위의 초록은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다. 다 그대로이다. 냄새의 진원지를 찾아 코를 킁킁거린다. 한 줄기 바람에 고기 타는 냄새가 실려 지나간다.
퀸스 버쓰데이, 2차 코로나바이러스 규제가 풀리고 나서 처음 맞는 연휴이다. 주내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지고 식당이나 카페의 제한 인원도 50명으로 늘었다. 사방에 둘러쳐 있던 투명한 막이 걷어진 느낌에 몸마저 가볍다. 지금 이런 좋은 기분을 깨고 있는 정체는 이웃집에서 건너온 바베큐하는 냄새였다. 철렁했던 가슴이 가라앉으며 그새 잊고 있었던, 불탄 블루마운틴 자락으로 마음이 바쁘게 옮겨지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딸에게 빌핀에 가서 점심을 먹자고 청해본다. 빌핀에서 생산되고 있는 애플파이와 발효 사이다를 좋아하는 딸은 벌써 자동차 열쇠를 챙기고 있다.
오랜만에 풀린 규제 때문인지 빌핀으로 가는 길은 제법 차가 많다. 블루마운틴 북쪽에 자리한 빌핀은 사과가 많이 나는 동네로, 산불 피해가 컸던 곳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일부러 들러 가을걷이하듯, 사과와 애플 사이다를 사 들고 오곤 했다. 과수원은 열었을까. 사과는 제대로 수확했을까. 내가 찾아가고 있는 샐러 도어는 무사할까. 길을 나서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조바심이 떠나질 않는다. 
산불이 잠잠해지면서 물난리를 겪고, 바로 불어닥친 코로나 팬더믹으로 산불은 기억 속에서 까맣게 지워졌었다. 4개월 전, 나는 불이 수그러들자 바로 산을 찾았었다. 그때 마운트 빅토리아에서 빌핀으로 내려가며 보았던 숲은 아랫도리가 텅 비어 있었다. 뼈만 남은 나무들은 하나 같이 숯검정이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민둥산에 새까맣게 그을린 나무들이 끝없이 꽂혀있는 모습은, 바로코 화풍의 그림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불꽃을 닮은 듯한 빨간 싹이 드문드문 솟아 있었지만, 초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과농장을 지키려던 소방관들의 사투와 주민들의 아우성이 되살아나며, 나는 뜨거웠던 지난여름의 악몽으로 다시 빠져들어 간다.

처음 재 냄새를 맡았을 때는 평소처럼 기관에서 하는 백 버닝이려니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을로 내려오던 매캐한 냄새에 익숙한 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반나절이면 걷히던 탄 내가 다음날이 되어도 그대로였다. 빨래와 야외 테이블에 재가 쌓이는가 싶더니 연무가 걷히질 않았다. 채널마다 산불 보도가 메인뉴스로 등장했고, 가까이 에핑에서 저절로 불이 붙은 나무 동영상이 폰으로 배달되었다. 곧 잡히겠지 하던 불길은 전국에서 동시에 붙어 올라왔다. 불의 대부분은 자연발화였고, 모방 방화도 적지 않았다. 기온이 연일 40도를 웃돌았다. 최고 48.5도를 찍은 날도 있었다.
연말이면 더 바빠지는 회사는 에어컨을 최대치로 가동했다. 밤에도 누그러지지 않는 열대야 때문에 밤잠을 설쳐댔다. 새벽 출근을 하는 나에겐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출근길,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차를 모는데, 연무에 막혀 빛을 퍼뜨리지 못한 태양이 붉은 달처럼 보였다. 그 달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한낮에도 하늘에 걸려있어, 보는 이의 감성을 묘하게 자극했다. 색이 너무 해괴하고 고혹해서 내 눈에는 두 마음 품은 악녀처럼 음습해 보이기까지 했다. 국운이 쇠하던 신라의 마지막 달빛이 저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불안감이 커졌다. 타운 홀이나 오페라 하우스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사진기를 높이 들이댔지만 아무도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연기가 집 창문 틈을 뚫고 방까지 들어왔다. 도시 전체가 타는 느낌이었다. 아니, 지구 전체가 벌겋게 달궈지고 있었다. 시드니가 소돔과 고모라로 바뀌는 장면을 상상하며 기도란 것을 간절히 했다. 그러나 12월 마지막 날에도 여전히 붉은 달은 지상에 빛을 퍼뜨리지 못했다. 
2019년 마지막 날, 하버브리지 불꽃놀이 행사가 여론에 밀려 취소되나 했는데, 폭죽은 제시간에 보란 듯이 발화되었다. 그날 내 두통은 뱃속까지 내려갔다. 여름이 다하는 동안 비는 결코, 오지 않았다.
 
어느새 길은 산으로 접어들어 오르막으로 바뀌어있다. 머릿속은 아직 지난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저만치에 숲이 보인다. 분명 초록이다. 다 채워지지는 않았지만, 나무마다 초록 잎들이 통통하게 달려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붉은 기운을 초록으로 바꾸느라 하늘과 땅과 바람은 얼마나 분주했을까. 사람이 바이러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자연은 숲을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빌핀은 사이다 샐러 도어가 있는 농장마다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찾은 곳도 다른 때보다 복닥거린다. 더럭 겁이 난다. 벌써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차에서 선뜻 내리질 못한다. 어느새 규제와 통제에 익숙해진 내가 사람을 피해 나를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차 문을 열자 상큼한 애플 사이다 향이 반갑게 맞아준다. 인원 제한 때문에 실내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야외에 설치된 판매대에서 제대로 숙성된 탭 사이다를 먼저 맛본다. 3대가 함께 운영하는 단골 농장에는 원조 격인 주인 할아버지까지 나와 있다. 그의 안내를 받는다는 것은 오늘 운이 좋다는 의미이다. 불을 이겨내고 코로나 규제도 풀려 다행이라며 위로의 덕담을 주고받는데, 그의 웃음 끝에 알 수 없는 바람이 부서진다. 덤으로 얹은 사이다까지 종류별로 챙겨 차로 향하는데 공사를 하다 멈춘 주차장 한쪽이 눈에 띈다. 
나는 가을걷이를 마친 농부마냥 뿌듯해져서 뒷정원을 둘러 본다. 여긴 벌써 가을이 깊숙이 와있다. 하늘과 땅은 이제 한시름 놓았는지 더없이 고요하다. 농장을 나와 큰길로 꺾어지는데, 샐러 도어 아래쪽 울타리에 무엇인가가 커다랗게 설치되어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부착물은 부동산 에이전트에서 설치해 놓은 광고판이다.
' FOR SALE ’
마른 바람처럼 부서지던 그의 웃음이 그 위에서 다시 부서져 내린다. 사람의 질서가 자연의 질서보다 회복되기가 더 힘든 것인가. 새 주인이 오면 불탄 나무에 싹이 돋듯, 이곳에도 새로운 사과 향이 돋을까. 도착해서 마신 애플 사이다의 알콜 기운이 이제야 도는지 몸에 열이 오른다. 내 안에서 또다른 불이 시작되려나 보다.


유금란 수필가
산문집 <시드니에 바람을 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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