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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단상 ] 잊어버린 열쇠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 승인 2020.06.25 14:04

살다보니 내가 쓰고 있는 방이 3 개나 된다. 빅토리아 애비뉴(Victory Ave.) 2번지와 4번지, 우드포드(Woodford) 3 번지의 블루마운틴 상락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3 채의 집을 오가면서 지내니 집 없는 분들에겐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2 번지 방은 원래 주지실인데 전임 주지가 몸이 불편해서 자리를 비우게 되어 내가 임시로 그곳을 쓰게 되었고  4 번지는 내가 쓰고 있는 방이다. 우드포드(Woodford)의 집은 1년 전 인연이 되어 우리가 구입해서 내가 가끔 들리면서 사용하고 있다. 
팔자가 좋은 것인지 또 역마살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텅 빈 기차를 타고 오가면서 푸른 겨울산을 바라보는 한가로움에 그저 미소를 짓는다. 그 보다도 더 훈훈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산중에 며칠만에 주기적으로 오는데도 비워둠에 대한 불안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약간 경사진 곳이라 문이 3 개나 된다. 언제나 열려 있는 그 문들이지만 언제 와도 같은 모습으로 제 자리에 서 있다. 그런 분위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드니의 주택가들, 그래서 가끔은 이곳에 사는 것이 은근히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부엌으로 들어가는 중간문은 잠그고 내려간다. 
그렇지만 내 방 3 곳은 열쇠가 없다. 한국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무소유를 생각해서 일부러 적게 가져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가 탐이 나서 갖고 싶을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였는지 옆방 승려들이 출타시에 주먹만한 큰 자물통을 잠궈둔 모습이 내 마음엔 그리 좋게 보이질 않았다. 그 스님들은 귀한 책이나 고가의 미술품 등을 소장한 이도 있었지만 그런 물품이 전혀 없는 승려들도 나갈 땐 반드시 문을 걸고 나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나의 호주머니엔 내 방 열쇠가 없다. 하긴 있는 것이라곤 잿빛 장삼과 가사, 불경책 몇 권이니 기독교 일색인 이곳에서 그걸 누가 가져갈 것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메디케어 카드 등 신분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것은 손들개 작은 천가방에 들어 있으니 그것만 들고 나오면 만사 오케이다. 잠그지 않고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시드니의 분위기, 시간이 지날수록 이곳에 살고 있음에 대한 자부심이 이따금씩 물안개처럼 피어 오른다. 
이런 분위기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그 도를 더해간다. 언젠가 브리즈번 가는 길목에 아보카도 모양을 크게 만들어 놓은 간판이 보였다. 그곳에 들려서 농장 구경을 했는데 그 근처에 작은 바나나 줄기를 수북하게 쌓아 두고 가격만 적어 놓고 아무도 없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그 많은 차량이 오가는 도로변에서도 돈 통만 놓아둘 수 있는 그 신뢰의 길, 그런 길을 오갈 때의 발걸음은 한결 더 가볍고 마음 또한 상쾌하다. 
어느 때였던가? 어딜 찾아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만나게 된 시골 마을 길가에 계란 박스를 소복하게 쌓아 두고 그 곳 역시 값만 적어 두고 돈 통만 곁에 있었다. 작은 플라스틱 통 속엔 20 달러, 5달러 등의 지폐와 동전이 제법 많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믿고 사는 세상의 넉넉함이 내 마음을 움직여서 3 박스나 사게 되었다. 
드러내 놓고 신뢰를 보일수록 그 믿음은 두배의 신뢰로 향기까지 더해져서 주인에게 되돌아 간다.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기분좋게 살 수 있다는 증표를 내보인 두 곳의 모습, 호주의 시골은 그런 풍경이 있는 곳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본인의 방 열쇠 없음이 욕심 적음의 은근한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다. 가만히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 나의 성정이 본래 그렇고 그것은 자신이 지은 복력의 크기가 그 만큼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많이 가지며 지키는 것도 그 만큼의 힘과 분수가 받쳐 주어야 된다. 나는 그런 것이 있으면 도리어 짐스럽고 마음이 불안하다 보니 내 살기에 편안하기 위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고 보면 또 다른 이기적 발상에서 그렇게 된 것이다. 

화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단비 시방에 골고루 내리지만, 그릇만큼 사람들은 받아 간다네.’

열쇠 없는 3 개의 내 방은 내 몫 만큼의 풍족한 공간이 되어 주고 있는 오늘과 내일이다.

기후 스님(시드니 정법사 회주 스님)  info@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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