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타던 차가 문제가 있어 서비스센터에 맡기고 차 회사에서  SUV한대를 대여해 줘서 빌린 차를 타고 다녔다. 며칠 전 이른 새벽에 다녀 올 데가 있어 밖엘 나가려다 아직 어둑한데, 비도 내려 뒤를 잘 보지 못하고 우리 집의 담벼락에 차를 부딪치고 말았다. 우직끈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바닥에 플라스틱 조각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제법 많이 찌그러 졌겠네하며 비를 맞으며 급히 내려 보니, 차 뒷면 코너의 깜빡이 등이 깨지고 뒷부분과 범퍼가 심하게 파이고 스크래치가 생겼다. 

그래서 오늘은 차를 정비소에 맡기고 이틀동안 차 없이 대중 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빌린 차로 사고를 냈으니 더 빌려 쓰고 싶은 마음도, 주위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부담이 됐다. 아내는 모처럼 잘 됐다며 걸으며 운동도 하고 전철을 타고 시내도 가자고 한다.  

 지난 주 며칠에 걸쳐 주말까지 비가 오더니 모처럼 날이 개었다. 비가 온 후, 공기는 시원하고 하늘은 맑고 푸르다. 뉴잉턴 지역의 산책길을 걷다가 길도 헤매며, 운동 삼아 가는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봄날같은 겨울 날씨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올림픽 파크까지 도착했다. 

넓게 펼쳐진 광장엔 유난히 커다란 건물만 휑하니 자리를 잡고, 오고 가는 사람이 없으니 마치 먼 곳에 휴가를 온 것 같은 여유로운 착각이 마음에 스민다. 

좀처럼 전철과 대중 교통을 이용한 적이 없는 나에겐 거기에 그런 큰 역이 있었는지, 그 안에 최고급의 근사한 화장실이 설치돼 있는 것도 새롭다. 여행을 다니면 화장실이 없어서 난감해 하거나 그나마 돈을 내야 시설을 사용할 수 있는데 초현대식으로 잘 지어놓은 역과 화장실을 무료로 쓸 수 있다는 것에 쇼핑몰에 걸친 세일 사인을 발견한 여성의 흥분된 마음에 버금가는 감격이 있다. 

전철엔 텅빈 자리가 많았다. 아내는 옆자리에 앉자 OPAL카드만 있으면 하루종일 어디를 다녀도 거의 공짜라면서 전화기 카버 뒷면에 끼어 넣은 카드를 보여주며 친구 아줌마들로부터 배운 OPAL 카드 최근 패션을 자랑한다.  여러 역을 거쳐 써큘라키에 내리니 이미 여러번 시내에 나와 본 관록으로, 관광가이드처럼 이쪽 저쪽 출구를 알려준다. 어눌한 촌뜨기 관광객을 안내하 듯 카드 찍는 기초 상식과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 팁들을 제공하며 모처럼 남편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에 위압적인 표정을 감추려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시드니는 시내 한 가운데에 바다가 있고 넘실대는 파도와 널찍이 푸른 고목들과 운치있게 가꾸어진 정원이 있어 쫒기듯 살던 바쁜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잘 가꾸어진 잔디와 이름 모를 많은 수목들 사이에 운치있게 자리 잡은 벤치들은 보는 것 만으로도 풍요로운 평화를 맛보게 한다. 역시 자연 속엔 각박한 세상의 풍파와 달리 충만한 생기가 있다.  점심도 먹고 바다도 보고 벤치에 앉아 책도 보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또 일어나 걷다보니 어느새 해질녁이 되었다. 이미 이 만보를 걸었다며  운동을 다부지게 했다는 보람을 자랑할 쯤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곧 결혼할 여자 친구와 함께 시내에서 저녁을 먹자고 한다. 젊은 세대답게 기동력을 발휘하여 금새 식당에서 만나니 마치, 낯선 외지에서 흩어졌던 가족을 오랫만에 상봉한 듯 반갑다. 

빚어 놓은 것 처럼 하얗고 환한 얼굴과 몸도 자그마한 미래 며느리는 한결같이 마음까지 예쁘다.  다리는 뻐근하고 몸은 피곤해도 하루에 담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낱낱이 다 찾아 누린 것 같다. 따사로운 햇살과 숨쉬 듯 신선한 공기와 눈에 푸른 하늘과 울창한 숲과 공중의 새와 찬란한 바다 위의 부서지는 파도를 아낌없이 선물로 베풀어준 신의 넉넉한 관대함 덕분이다. 신은 영원으로부터 날마다 우리에게 선물로 가득한 새로운 하루를 아낌없이 토해 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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