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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하우스] 자살
김봉주(자유 기고가, 부영 고문) | 승인 2020.08.06 15:17

청소년 시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진한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괴테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이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슬픈 이야기가 당시 유럽 젊은이들에게 모방 자살의 빌미를 제공했다.

롯데 창업자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서 이 작품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여주인공인 롯데의 이름을 그가 창업한 기업 이름으로 명명했다.

세계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한국이 자살율 1위를 차지하는 불행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작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하루 평균 3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나타나 OECD 평균 하루 11명을 훨씬 초과하고 있다. 참고로 호주에서는 연간 약 3천명(하루 8.2명)이 자살을 한다. 

어느 해부터인가 한국 미디어에서는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는 아리송한 표현을 사용한다.

최근 박원순 서울 시장의 자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유명 정치인과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은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는 젊은이들에게 모방 효과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유교의 영향을 받아 ‘효(孝)’를 가정생활의 지표로 삼아 이어온 전통을 갖고 있다. ‘효경(孝經)’에 나오는 고사성어에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문장이 있다. 부모로부터 받은 몸의 터럭 하나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천번 창으로 찔리며 1만번 칼로 베이는 아픔으로 표현되는 어머니의 진통의 덕택으로 태어나 신생아와 유아 시절 1만8천번의 소변과 3천번의 대변을 손수 받으며 길러 주신 부모의 은덕을 생각 한다면 어찌 자살을 자행할 수 있단 말인가?

서양에서는 ‘효’의 개념이 희박하여 영어에도 적합한 단어가 없다. piety 라는 ‘어른에게 공손함’이라는 단어가 존재 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양 문화권에서는 ‘내 삶의 주인은 나다’라는 관습이 전통이 되어 개인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딸들이 외롭게 살고 있는 부모들을 크리스마스와 설날이 되어서야 찾아오는 이웃 호주인들을 보면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이자 성직자였던 풀루타크는 2천년 전에 그의 저서인 영웅전에서 자살은 명예를 빛나게 하기 위하여 할 일이지 해야 할 일을 회피하기 위한 수치스러운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살거나 죽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라고 갈파했다. 이 처럼 자살에 대한 성인들의 경구는 냉엄했다. 인간은 하나님이 소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며, 스스로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리라.

누구나 삶에 공과가 있다. 다만 죽음으로 과오를 덮으려 하고 자살을 동정하거나 미화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죽음으로 과오를 덮을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어야 한다.
특히 사회 지도층이라 일컫는 고위 공직자의 자살은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의 자살율은 10대와 30대 연령층이 가장 많다. 생애 스트레스를 가장 민감하게 받는 세대인 이들은 직업, 경제, 건강, 연애, 학업 등이 원인으로 분석되지만 정치인, 연예인, 운동선수들의 자살 사건이 끼친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자 신의 섭리다. 산다는 것은 생각과 말과 발의 3중주라고 한다. 생각의 흐름, 말의 표현, 발의 동선 이 세가지가 오늘 나의 삶을 결정짓는다.

인터넷의 발달로 노년과 청년의 거리가 좁혀져 친구가 되는 길이 열렸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현대 문명은 노년과 청년이 어울리는 광장을 마련해주고 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위아래 10년 정도는 친구로 여기고 교류 하는 풍토였다고 한다.

삶은 우리가 조금씩 아껴가면서 꺼내 놓고 싶은 보배요 행운이라고 어느 시인은 읊었다. 우리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 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노인이 되어 질병이 찾아오면 당혹하게 된다.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어 두려움에 싸여 병원을 찾게 되며 목표를 완치에 두고 수술을 단행하여 고통 속에서 타계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노년이 되면 질병의 완치 보다 병과의 공존을 목표로 하면 어떨까? 미국에서는 노인 환자의 여생을 고통 없이 평안하게 치유 하는 노인병 전문의가 있어 환영받고 있다고 한다.

만약 본인이 의식을 잃었을 때 연명 치료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미리 기록한 ‘사전 의료 의향서’를 작성하여 홈닥터에게 보관할 것을 권고한다. 유언장(will)도 겸하는 이 서류에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본인이 의학적 소생이 불가능 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 기계적인 생명 연장 수단을 강구하지 말아 주세요. 단 통증 조절이나 편안한 임종을 맞이하기 위한 제반 조처를 취해 주셔서 위엄 있는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일몰 앞에서 자녀들과 친척에게 부담을 안기지 않기 위해서 이 서류는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자살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으며 자살은 속죄가 될 수 없다.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 위반 행동이며 부모님의 은혜를 배반한 불효 행위이기도 하다.

‘자살’을 반대로 생각을 바꾸면 ‘살자’가 아닌가?

김봉주(자유 기고가, 부영 고문)  bjk194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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