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시는 8월5일(수) 자정부터 재난사태  4단계에 들어갔다. 코로나 감염 확산을 막겠다는 비상조치다. 이날 하루 최다인 15명이 사망했다. 저녁 8시부터 통행금지가 시행된다. 대부분의  숍들도 문을 닫아야 한다. 뉴스에 나오는 멜번의 도심이,  죽은 도시처럼 썰렁하고 적막했다. 그 도심에 있는 유나이팅교회 총회 사무실에서 5년여  사역해서 낯익은 거리다. 자유분방하고 활기 넘치던 모습과 비교되어 마음이 아프다. 고스포드(Gosford)는 비교적 자유롭지만, 자원해서 집콕 격리를 하고 있다. 그런 어수선한  날에,  창밖의 전경을 바라보다 우연히 주운 괜찮은 생각도 있다. 

시인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가 있다. 호주는 한국과 반대로 북향으로 낸 창문이 바람직하다.  창은 그 방향에 못지 않게 크기도 중요하다. 건축가는 좋은 전망을 위해 가능한 넓은 창을 내려고 애쓴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건축가도 그렇게 한 것 같다. 거실의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다. 크고 넓은 창문인 셈이다. 그래서 작은 공간이지만 갑갑하지 않아 좋다. 

브리스베인 워터가 보이고,  더 멀리로는 마을과 산등성이들이 이어진다. 하늘은 수시로  변하는 구름의 형상으로 새롭게 채워진다. 바다의 색깔은 아침 저녁으로, 또  하늘의 색깔에 따라 변한다. 노을빛으로 채색된  해질녁의 하늘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바다까지 같은 노을빛으로 물들여진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너무 쉽게, 몇분안에 어두움에 묻히고 만다. 삶 속에도 큰 행복이나 황홀한 순간이 있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 머물다 스쳐가는 건 아닐까? 전에는 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을까? 

지난 주간에는  이삼일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하늘은 희뿌연 구름으로 덮히고 바다는 잿빛 안개 커튼으로 가리워졌다. 바다 건너편의 그린 포인트며 엠파이어 베이와 워이워이의 정경을 전연 볼 수가 없었다.아름다운 풍광도 비오는 날이나, 짙은 안개가 덮히면 보이지 않는다.  밤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삶속에도 비오는 날이 있고 안개로 싸여 분별이 흐려질 수도 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느껴지는 밤같은 시간도 있다. 실상 중요한 것들이 여전히 그곳에 있는데도 말이다. 믿음의 생활도 때로는 그와 같지 않을까? 믿음의 실상이 분명한 것을 알지만, 눈으로 볼 수 없을 때가 많지 않는가! 집의 창은 채광을 위한 기능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 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보게 하며, 느끼게 하며 생각케 한다. 창 밖의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교감케 하는 통로가 된다. 

지식의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제법 묵직한 상념도 있다. 보통 집이나  산과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고  해는 동쪽에서 떠 올라 서쪽으로 진다고 말한다. 우리 눈으로 매일 확인하는 평범한 현상이다. 또 이것은 우리가 잠자고 일어나고 일하는 생활의 리듬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더 확실하고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해는 항상 제 자리에 있다. 지구가 돈다고 했던 갈릴레오의 말처럼,  지구는 매일  한바퀴씩  자전하고 있디. 바로 이 때문에 밤과 낮이 구분되고, 대기의 순환 등이 일어 난다. 1년에 한번씩 태양 주위를 돌고 있어 계절의 변화를 경험 할 수 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순한 과학 지식이다. 매일 이 큰 지구가 빠르게 돌고 있는데 왜 아무런 진동을 느낄 수 없을까?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속 1,670Km이다. 서울 부산간의 거리를 11분만에 갈 수 있는 속도다. 그런 속도라면 엄청난 굉음이 예상된다. 그런데 왜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는가?  인간의 청력은 범위 밖의 너무 크거나 작은 소리는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지구를 싸고 있는 대기도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큰 소리를 줄여 준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그렇게 진화 되었다고 말한다.  나의 논리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고 지금도 직접 주관하신다고 믿는 것이 더 쉽다. 더 논리적이다. 그래서 나는 평범한 아침과 저녁을 맞으며 감동할 때도 있다. 작은 일상과 자연을 통해서도 문득 그 분의 임재와 손길을,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현재라는 창을 통해, 오늘 하루를 붙잡고 충실하게 살기 원한다. 나이 들어 가면서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옛 사건들을 얘기하며 과거의 자랑이나 일들을 그리워한다. 반면에 다수의 젊은이들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준비하며 산다. 이해할 수 있다. 필요한 덕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이 너무 힘들고 아프지 않는가? 내일이나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게 아닌가?  살아온 날에 비해 살아갈 날이 더 짧고 제한되어 있는 내게는, 현재 오늘 하루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구절이 있다. 보통 우리말로  “오늘 하루를 즐겨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줄 안다.  원래 ‘카르페’는 농사에 관련된 말로 추수하다는 ‘카르포’ 동사의 명령어이다. 그래서 오늘을  수확하라 혹은 오늘에 의미를 두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추수의 기쁨과 연관시켜 즐거워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기쁨, 감사, 충만함, 영혼의 평화를 의미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카르페 디엠에 공감한다. 오늘에 충실해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의미를 느끼며 평화 가운데 살기 원한다. 과거의 자랑이며 후회는 이미 지난 것이고, 내일은 최소한만 믿을 수 있는 불확실한 것이니까 말이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고, 게으른 습관 그대로이다. 어리숙하면서도 무시당하면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는 한다.  많이 덜 된 사람이다. 아내의 말이니까  90% 이상 정확한 내 모습인 줄 안다. 그래서  현재의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며, 소통하며, 배우며 ‘카르페 디엠’하는 매일을 살기 원한다. 그것이 비록 요즈음처럼  질병으로 재난사태가 선포되는 등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런  현재라도 상관이 없다.  아니 어렵고 어수선한 현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살기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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