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로나-19가 거세게 확산 중이다. 2차 유행이 멜번과 시드니를 뒤 흔들고 있다. 지난 연말 산불이 온 사방을 태우고 있을 때 많이 어려웠다. 세상 끝이 오는 것 같았다. 그 보다 더 ‘쎈 놈’이 올 줄을 누가 알았던가? 유람선 루비 프린세스가 시드니항에 들어오면서 비상이 걸린 3월 말, 난 컬럼을 쓰면서 이런 제목을 붙였었다. “코로나바이러스, 곧 끝납니다.” 에볼라나 메르스처럼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4개월 동안 기승을 부리던 산불의 위력을 훨씬 뛰어넘었다. 팬데믹, 즉 전세계적 위기다. 호주를 강타한 지 이미 5개월이 넘어간다. 이번 주 다시 NSW 산불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는 산불과 코로나의 협공을 받으며 남은 2020년을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지난 달 칼럼에서는 단테의 <신곡> ‘인페르노(지옥)’편을 인용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이렇게 올해는 우리네 인생에서 흑역사로 남는다.

2.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코로나 팬데믹에 겹쳐,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이 100년만의 홍수를 경험하고,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130년만의 살인 폭염이 찾아와도, 세상은 그리 쉽사리 망하지 않는다. 지구 표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땅과 하늘은 여전히 견고하다. 요새 그 땅의 위대함을 새삼 발견하고 있다. 집 밖 외출이 제한되니 집 안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아내는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티로폼 박스를 모아왔다. 15리터씩 파는 고가의 흙을 사다가 채우고 야채 씨를 심었다. 40종이 넘는다. 그렇게 나는 농부의 남편이 되었다. 정말 흙(땅)은 위대하다. 흙에는 규소 28%를 비롯해서 무수한 광물들이 섞여 있다. 그 사이를 함량 47%의 산소가 헤집고 돌아다니며 영양을 섞어 줄 때, 흙에 품겨진 씨앗은 싹을 틔우고 푸르게 자란다. 신선한 산소를 공기 중에 뿜어주고, 먹을 것을 내주며, 눈의 피로를 풀어준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땅을 마구 파헤쳐 거대 도시를 만들었다. 100층짜리 철골 콘크리트 건물을 지어 올리며, 마당을 돌로 덮어 버렸다. 당연히 땅은 숨 쉬지 못하고, 박쥐는 갈 곳을 잃었다. 그런 우리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는 경고한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고. 원래 흙에서 왔고,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인생인데, 돈과 야욕으로 지어진 도시에 너무 매달려 살지 말라고. 

3.
시사 주간지 TIME에서 매일 전해 주는 코로나-19 소식을 들었다. 한 단어가 날아와 꽂혔다. 현 사회를 정의하는 ‘Apathy(냉담)’이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와 연대하면서도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살았다. 1969년 인류 최초로 암스트롱이 달에 발을 디뎠을 때, 그는 홀로 하지 않았다. 선두 자리를 경쟁하지 않으며 묵묵히 뒤 따랐던 버즈 알드린이 있었고, 그 둘을 내려 보내며 홀로 달 착륙선을 지켰던 마이클 콜린스가 있었다. 그 세명 뒤에는 40만명이 넘는 나사의 과학자들이 있었고, TV를 보고 있던 수억의 미국인과 온 세계가 있었다. 나 역시 온 대한민국 국민들과 함께 흑백TV로 그 광경을 보며 감격했다. 그 때로 말하자면 20인치 브라운관 흑백 TV 하나로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김일 장영철 천규덕의 레슬링을 보던 때다. 그 때만 해도 ‘함께’ 라는 단어가 사회와 가정에 존재했었다. (잘 기억나지 않으면 ‘응답하라 1997, 1994, 1988’을 보라.) 그러나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드러난 것은 ‘냉담’이다. 3,000년 동안 ‘함께’ 해 왔던 것들을, 단 ‘30’년 만에 갈아 치워버렸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오기 전에는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별 반응하지 않는다. 타인의 불행에 동감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하게 될 위험에도 불감증이다. 그렇게 좀비화된 인류를 코로나바이러스는 고발한다. 한 집에서 함께 살고, 교회당이나 비행기나 쇼핑 센터 안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악한 것에 감염될 수 있다는 역공격으로 이 시대를 고발한다.  

4.
그래도 세상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다시 코로나-19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것이다. 상황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냉담도가 증가한다는 말이다. 찔러도 피가 나지 않고, 피가 나도 그냥 돌아다니는 좀비의 세계가 된다. 현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위험이다. 계속 찾아올 변종 바이러스나, 자연의 반격이 아니다. 비인간화되고, 냉담화되는, 좀비의 세상이 되는 것이 가장 큰 위기다. 이제라도 정신차려야 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라고 외치던, 1969년 만화의 주인공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처럼 몸부림 쳐야 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단테의 <신곡>를 펼쳤다. <신곡>은 3부로 되어 있다. 단테는 당연히 천국에 먼저 가고자 했다. 그러나 지옥을 먼저 살펴 봐야만 했다. 그 장면을 보자. 

“1300년 봄 35세의 단테는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언덕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음란한) 표범, (오만한) 사자, (탐욕의) 암늑대가 길을 가로막는다. 그때 안내자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말해준다. 저 아름다운 언덕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다른 길, 즉 저승 세계를 거쳐 가야 한다고. 그리하여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저승 여행길을 떠난다. 하나의 시를 읊으면서. 

“..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 나는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 아, 얼마나 거칠고 황량하고 험한 숲이었는지 말하기 힘든 일이니 /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 죽음 못지않게 쓰라린 일이지만, 거기에서 찾은 선을 이야기하기 위해 / 내가 거기서 본 다른 것들을 말하련다.. ”

지금 이 세상은 ‘준(準)지옥’이다. 그러나 여전히 천국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있다. 그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코로나-19에서 ‘선한 것’을 찾아 내야 한다. 도망갈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찾아내야 한다. 흙이 있는 땅을 밟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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