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된 전투기가 동네 한복판에 전시되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 평상시와 다름없이 베란다에 나가서 가볍게 몸을 풀며 심호흡한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하는 바람이 심하다. 그러나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하는 춥지 않은 아침이다. 집에서 벗어날 생각을 한다. 너른 들판을 볼 수 있는 윙햄(Wingham)이라는 동네에 갈 생각을 한다. 
윙햄은 내륙으로 40여 분 운전하면 갈 수 있는 가까운 동네다. 따라서 들판이 보고 싶을 때마다 찾아가는 친숙한 동네다. 인구 5,000명 정도 되는 자그마한 이 마을에 막연히 알고 지내는 지인도 있다. 로빈(Robyn)이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다. 로빈에게 전화를 해본다. 점심을 같이하자는 나의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인다. 

로빈은 윙햄에서 태어나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 이곳에서만 사는 동네 토박이다. 시골의 작은 마을을 벗어나지 않고 60년 이상 살고 있다. 한국을 떠나 모든 것이 생소한 호주까지 이주해 와서 지내는 나로서는 로빈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로빈은 고향에서만 지낸 자신의 삶을 무척 대견스러워하는 눈치다. 동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윙햄 자랑을 자주 한다.  
제법 큰 도시 타리(Taree)를 지나 윙햄에 들어선다. 동네 입구에는 큼지막한 환영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호주 시골을 여행하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마을 표지판이다. 표지판 옆에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다. 공원 끝자락에는 오래된 풍차가 우뚝 서 있다. 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지하수를 끌어 올리던 오래된 풍차다. 풍차를 보니 옛날 동네의 모습이  대충 그려진다. 

지인과 함께한 건강에 좋다는 오가닉 음식만 요리하는 운치 있는 식당.

조금 일찍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주변을 걷는다. 오래되고 허름한 간판에 중국 식당 이름이 쓰여 있다. 이 구석까지 들어와 식당을 운영하는 중국 사람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동네라는 것을 알려주는 건물도 보인다. 건축 연도가 각각 1929년 그리고 1931년이라고 크게 새겨진 석조 건축물이 나란히 있다. 언뜻 보아도 역사와 전통이 있어 보이는 교회와 학교도 도로 건너편에 보인다. 
동네 한복판에 있는 공원에는 공군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다. 윙햄을 소개하는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비행기다. 전쟁에 참여했던 군용기를 군대에서 이 동네의 재향군인클럽(RSL)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설명서에는 비행기 이름이 ‘흡혈귀 제트기(Vampire Jet)’라고 적혀 있다. 이름이 잔인하다. 

예전에 통나무를 실어 나르던 화물선이 정박했던 매닝강 상류.

공원에는 거대한 통나무도 전시해 놓았다. 통나무에는 길이 16m 그리고 무게는 19t이라는 설명서가 붙어있다. 내륙에 있는 작은 동네이지만 목재 사업이 번창했던 동네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맞추어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니 로빈이 반갑게 맞이한다. 점심시간이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로빈은 동네 한복판 식당들이 있는 곳으로 앞장서 걸어간다. 지나치는 식당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마지막에 있는 식당을 가리키며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는 식당이라며 들어간다. 

타일로 윙햄을 상징하는 소와 통나무 등을 모자이크해 놓았다.

식당 분위기가 좋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너른 정원에 식탁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맑은 날씨에 이름 모를 화초와 식물에 둘러싸여 있는 식탁에 앉으니 음식이 나오기 전이지만 입맛이 돈다. 시골 동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식당 분위기에 매료된다.
메뉴를 본다. 오가닉 식당답게 각종 야채 이름이 많이 쓰인 호감 가는 음식이 대부분이다. 상대방에게 음식 주문을 맡긴다. 로빈은 익숙하게 음식 설명을 하며 나름대로 주문한다. 이곳에 자주 온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타일로 많은 많은 형상을 모자이크 해놓은 특이한 의자.


분위기 있는 식탁에 앉아 지인에게 동네 이야기를 듣는다. 아일랜드 사람과 스코틀랜드 사람이 오래전에 정착한 동네라고 한다. 지금도 매년 6월이 되면 스코틀랜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물론 올해는 바이러스 때문에 축제가 취소되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더니 이곳에서는 화목하게 지낸다고 이야기하며 옅은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윙햄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이름 뜻은 모르겠으나 영국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지명이 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윙햄은 벌목한 나무를 가공하는 공장과 도축장이 있는 150년 이상 된 동네다. 지금도 도축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도축장 주인이 일본 사업가라고 한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일본에 수출하려고 일본 기업이 인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식사를 끝내고 몇 번 가 보았던 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윙햄의 볼거리 중의 하나인 박쥐가 많은 산책로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네 터줏대감답게 잠시 걸으면서도 로빈은 지나는 사람과 인사를 나눈다. 이 동네에서만 60년 이상을 살았으니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매닝강(Manning River)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다. 아담한 선착장이 있다. 보트를 타고 낚시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을 위해 만든 선착장이다. 이곳까지는 나무를 실어 나르는 배가 물줄기를 타고 올라 올 수 있다. 따라서 오래전 화물선이 드나들며 목재를 실어 나르던 곳이다. 오래전에 사용했던 선착장 흔적이 아직도 있다. 

이곳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작은 타일로 모자이크한 의자다. 동네를 상징하는 물고기, 가축 등을 타일로 멋지게 묘사해 놓은 특이한 의자다. 동네를 위해 봉사했던 사람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박쥐가 많은 이색적인 산책로에 들어선다. 새로 보수한 산책길은 동물들의 이동에 방해되지 않도록 땅에서 1m 정도 높이에 만들어져 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야생 칠면조가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칠면조가 알을 낳으려고 만들었다는 큼지막한 덤불도 군데군데 보인다. 덤불 안은 따뜻하기 때문에 칠면조가 알을 낳아 부화 시키려고 만들었다고 한다.

수많은 박쥐가 나무에 과일처럼 매달려 있는 산책로.

오래된 거목도 많다. 나무 위에는 박쥐들이 다닥다닥 나무 열매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한국에도 박쥐가 있느냐고 로빈이 묻는다. 동굴에 박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나무에서 사는 박쥐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을 들은 로빈은 아마도 그것은 호주에서 이야기하는 박쥐(flying fox)가 아니고 다른 종류의 박쥐(bat)일 것이라고 한다. 이 방면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차이를 이해할 수 없다.

동네 소개를 열심히 해준 로빈과 헤어지고 자동차에 오른다. 문화유산에 올려 있다는 석조로 지은 우체국 건물을 지나친다. 큰 통나무를 가득 실은 트럭을 만나기도 한다. 아직도 목재 사업이 한창인 것을 알 수 있다. 

오늘 함께 지낸 로빈을 생각한다. 한 동네에서 일생을 보낸 삶이다. 문득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생각난다. 칸트는 자신의 사는 동네를 벗어나지 않은 철학자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한곳에서 오래 지내면 권태를 느낀다. 따라서 요즈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여행을 못 간다고 투덜대는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나 또한 집을 자주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에 불만이 많다. 여행하지 못하는 내 처지를 보며 양로원이나 집에서 외롭게 지내는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동네에서 벌목한 통나무를 전시해 놓은 공원

삶에는 정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성인들은 한결같이 행복은 멀리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 주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 때문에 한곳에 머물기를 강요당하는 요즈음, 지금 처한 주위 환경을 받아들이며 만족하는 삶을 연습한다. 행복한 삶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누릴 수 있다는 성인의 말씀을 곱씹어 본다.

동네 입구에는 방문객을 환영하는 표지판과 작은 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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