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SA 이야기 2
 
리카의 주근깨가 짙어졌다. 볼에 박힌 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까맣다. 혹시 달거리 중인가? 찬찬히 들여다보려는데 찡긋 윙크 한번 날리고는 재빨리 라커룸을 빠져나간다. 153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22인치쯤 되어 보이는 잘록한 허리를 가진 필리핀 여인, 리카가 떠난 자리에 향수 내음이 진동한다.

리카와 나는 회사에서 장애우 직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출근하면 그날 해야 할 일을 개인의 상태에 맞게 배치해 주고, 완성된 분량을 보고서에 기록하는 일이다. 직원들 대부분은 성격장애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어 겉으로 보아서는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개인차가 크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일하는 동안 긴장감을 유지하며 몸과 마음을 효율적으로 써야만 하는 이유이다. 리카는 장애우 직원들에게 지나치게 친절해서 문제가 되곤 한다. 그들이 독립적으로 일을 하게 도와야 하는데 자기 몸을 먼저 쓰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조금만 힘들어한다 싶으면 어느새 달려가서 해결해 주고 있다. 성질이 급해서라기보다는 지시나 요구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이다. 테이블 세팅에서부터 각자 맡은 일까지 마무리해 주느라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질 못한다. 그래서 리카는 인기가 많고 정말 바쁘다. 손놀림은 마치 드럼 주자처럼 정교하고 리드미컬하다. 때론 무거운 것도 거침없이 들곤 하는데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혀가 내둘러질 때가 많다. 

리카가 지적 장애우인 로이와 결혼해서 호주에 왔다는 사연을 알게 된 것은 입사하고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결혼이민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 둘이 부부라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뭔가 조화가 맞지 않는 이 커플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젊고, 예쁘고, 지적으로도 빠지지 않는 리카가 로이를 선택한 것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면 경제적인 이유인데, 리카는 아무리 피곤해도 오버타임을 마다한 적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경제적인 면에서도 자유롭지 못해 보였다. 더구나 로이는 지적장애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많이 약해 보이는 친구가 아닌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로이는 시력이 나빠 몸이 굼뜬 것에 비해 말이 빠르고 많은 편이다. 그런 상태를 깜빡 잊고 그와 말 댓거리를 하다가는 종종 낭패를 보게 된다. 나 또한 로이와의 사이에서 잊을 수 없는 모멸의 추억이 하나 있다. 

회사 식당에 걸린 대형 텔레비전에서 북한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북한을 한국 전체로 착각하고 있던 로이는 한국에 대한 위험을 알리며 여행을 하면 절대 안 되는 나라라고 주변에 대고 열을 내며 떠들기 시작했다. 핵의 위험과 가난 등등 너무 구체적으로 북한 상황을 나열하면서 서울을 들먹거렸다. 부드럽지 않은 이미지 때문에 종종 ‘김정은 누나가 아니냐’는 농담을 듣는 나로서는 신경이 곤두섰다. 결국, 한국을 가려거든 가까이에 있는 일본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참지 못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리고는 한반도 상황에 대해 꾸역꾸역 설명을 했다. 내가 한국인인 줄 모르고 있던 로이는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낯빛을 바꾸고는 내 영어 발음을 따라서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놀려댔다. 나보다 한참 부족하다고 여기던 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꼴이 되고 보니 내 처지가 한심스럽고 어이가 없었다. 말 때문에 겪은 사연이야 한둘이 아니었지만, 회사에서 내가 겪은 첫 번째 언어 수모 사건이라 잊을 수가 없다. 이런 로이가 내가 좋아하는 리카의 남편이라는 게 속상하고 답답하기까지 했다.
당시 리카의 낯빛은 어두웠다. 웃음도 자연스럽지 않았고, 로이와 붙어 있는 것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길을 걸을 때도 몇 걸음 앞서 걸었다. 로이는 그런 리카를 엄마처럼 따랐다. 가끔 그녀에게서 적잖이 짜증 섞인 목소리가 여과 없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리카가 영주권을 받으면 분명히 로이 곁을 떠날 것이라고 단정했었다. 지금 보니 그 모습은 그 후에 내가 겪은 신앙심 깊고, 사려 깊은 리카와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로이 부모의 전격적인 경제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리카가 계속 일을 하는 이유가 알려질 즈음이었다. 영주권 획득 후 장기 휴가를 내어 필리핀에 다녀온 뒤였다. 리카의 주근깨가 갑자기 눈에 띄었다. 드러나게 많아진 듯도 했다. 9남매의 맏딸인 리카가 보내 준 돈으로 필리핀에 있는 형제들이 공부하고, 집을 두 채나 샀다는 소문이 돌았다. 생각해보니 갑자기 주근깨가 많아진 것이 아니라 낯빛이 환해져서 주근깨가 상대적으로 잘 보였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즈음 주근깨를 가리려고 유난히 분첩을 두드려 대는 리카와 화장실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멋쩍은 미소를 보내왔다. 지난번 크리스마스 파티 때는 페이스페인팅으로 주근깨를 완전히 덮고 나타나 놀라게 했다. 그날 스테이지가 좁다고 느낄 정도로 춤을 추던 리카는 격렬하게 날갯짓하는 한 마리 새처럼 보였다. 지난 금요일 퇴근길에 맥주를 한잔하러 가는 길에서는 로이와 팔짱을 꼭 끼고 나란히 걸었다. 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은 과장되게 로이를 보살피는 리카에게서 여인의 향취가 물씬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 향취에 취해 덩달아 붉어졌고, 리카의 주근깨도 한껏 붉어졌다.
 
리카의 주근깨가 확연히 커지고 까매진 이유는 역시 떠버리 매니저 에드나에 의해 밝혀졌다. 주근깨를 빼려고 레이저 시술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몇 달쯤 후면 나는 리카의 주근깨를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은 더 고와지고, 여인의 향기는 더 진해질 테지. 몇 년 후에도 주근깨 없이 환해진 리카의 얼굴을 회사에서 계속 볼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녀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고 있는 것만 같다.

유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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