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길

철학적 사유를 실천한다는 의미가 뭘까 생각해 본다. 무조건 대상을 두고 종일 골똘한 사유에 잠긴다고 철학적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고 싶은 명품 시계 또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간 아름다움 금발의 여성에 대해 종일 생각에 잠겨 있을 수도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고 보니까 욕망의 지시를 따라 생각하는 것은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철학적 사유란 나의 현재, 나의 정체성, 나의 실존에 대한 회의부터 시작한다고 보겠다. 대체로 큰 사고나 불치의 병을 겪은 후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철학적 사유로 들어간다. 사고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온 나의 사업이나 경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할 때 사람들은 철학자가 된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 볼 때 위기란 철학에 입문하기에 적절한 기회가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위기를 당하고 철학적 사유로 대처하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좌절과 실망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져서 정신병 상담을 받아야 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풍경, 자연 조차 적극적인 관광 소비의 대상으로 이미지화 되어 버렸다. 우린 뉴질랜드의 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상상력은 뉴질랜들을 알리려는 광고 이미지에 이미 점령당했기 때문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는 나와 당신의 본질을 모른다. 우리는 단지 서로에게 알려진 이미지를 교환하고 있을 뿐이다. 시뮬라시옹이 본질을 압도해 버린 세상에 살고 있다.

아무튼 철학적 사유란 지금까지 내가 당연시 생각해 왔던 나의 존재, 나의 정체성 (그것이 무엇이든) 대한 깊은 회의로부터 시작되며 이 지점에서 180도 방향을 틀어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기 위한 때론 힘들고 때론 희열을 가져다주는 긴 여행을 떠나는 일종의 사유의 자유여행가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누구인데? 내가 지금까지 어떤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누려왔으며 많은 사람에게 어떤 명예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얼마를 노력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낡아빠진 훈장들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고 만나는 사람마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빛바랜 앨범 사진을 계속 펼치는 사람은 이런 자유 여행가가 될 소질도 자격도 없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이미지에 실종된 남자이다. ‘나’라는 본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가족과 자신이 속했으며 충성을 바친 조직(기업이나 사회 종교 단체) 안에서 성형수술을 받듯이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가공의 건물 또는 ‘기호 이미지’를 ‘나’라고 착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기호 이미지가 위기에 봉착하여 무너졌을 때 그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으나 기호학적으로는 사망한 존재이다. 정신병원 아니면 자살 외는 다른 옵션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위기에 처한 기업이나 정치인 또는 최근에 연속해서 발생하는 Kpop 연예인들이 자신의 삶을 자살로 결론을 내는 것이 아닐까? 
프랑스의 지성계 거목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를 시뮬라시옹 시대로 규정한다. 시뮬라시옹은 또는 시뮬라크르는 ‘가상현실’ 모조품 ‘이미지’ 정도로 해석된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대중매체와 전광판, 인터넷 등을 통해 ‘이미지’로 범람한 사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해상도를 갖는 이러한 이미지로 구축된 시뮬라시옹 세상이 현실을 대체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진단을 내린다. 다른 말로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이 가진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이미지에 목숨 걸고 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 안에 본질이 존재할 여백은 없다. 

이미지가 본질을 앞서 버린 사회가 우리가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대 석학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철학적 사유는 이러한 현실을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사유 이후에는 반드시 실천과 적용의 문제에 부딪힌다. 그것은 자유 여행가 각자의 몫이 되겠지만... 명품차를 종일 묵상하는 습관을 갖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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