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지나고 있다. 고국에서는 가을과 겨울의 건널목이지만 호주에서는 봄과 여름의 징검다리이다.
풍성한 감나무에서 감이 사라지고 나면 탐스런 잎새가 단풍과 함께 낙하한 자리에 빨갛게 물든 홍시가 추억처럼 달려 있는 고국의 늦가을이 떠오른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 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도는 울 엄마가 보고파진다. "

최근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대 데뷔 시절을 방불케하는 가창력을 보여 전국의 실버족에게 희망을 안겨준 가왕 나훈아씨가 불러 히트한 노래 ‘홍시’ 가사 일부이다.

고국의 지방에서는 대부분의 주택에 감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넓다란 정원에는 물론 시골 마을의 마당에도 한두 그루의 감나무가 자리잡고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하얗게 감 꽃이 필 무렵이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었다.

당시 감나무에서 나는 단감, 홍시, 곶감은 가족의 인기 간식 메뉴이기도 했다. 감은 서양인 보다 동양인 특히 한국, 일본,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과일이다. 호주인들도 감은 선호하는 과일이 아니다. 특히 홍시는 부패한 과일로 오해해서 멀리 한다.

감은 비타민 A, B, C 성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면역력을 강화하고 시력을 보호 한다. 특히 노년층에 많이 발생하고 있는 실명을 초래하는 질환인 황반 변성을 예방한다는 최상의 건강 과일이기도 하다. 단감의 타닌 성분이 지방질과 작용하여 변을 굳게 하기 때문에 변비 환자는 조심해야 한다.

감은 숙성 상태와 보존 상태에 따라 연시, 반시, 홍시, 곶감으로 나누어진다. 감은 익어갈수록 각종 영양 성분이 농축되어 곶감은 단감보다 당도가 3배에 이른다고 한다.

감이 익어갈수록 탁월한 효능이 나타나듯이 우리네 인생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혜와 경륜이 깊고 넓어진다. 
노년은 삶이 자유롭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일하기 싫으면 놀고, 놀기 싫으면 일하고, 머물기 싫으면 떠나고, 떠나기 싫으면 머물고.. 

노년은 바람처럼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대신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산이 높다고 해서 명산이 아니듯이 나이가 많다고 반드시 어른은 아니다.

만사를 가려보고 새겨듣고 판단이 그르지 않으면서 품위를 유지하는 생활이 존경받는 노년의 길이다.

발효와 부패라는 단어가 있다. 발효는 효모, 박테리아 등 미생물에 의하여 유기물이 분해되는 작용이다. 부패도 균에 의하여 단백질이나 유기물이 분해되는 작용이다.

발효와 부패는 유기물이 분해되는 과정은 같은데 효과는 정반대이다. 발효는 자신의 작용으로 더욱 유익한 물질을 생성하여 도움을 준다. 이에 반해 부패는 부패균을 발생시켜 악취를 풍기고 유독 물질을 배출하여 주위 환경에 피해를 준다.

노년도 이와 같이 두 가지 패턴으로 나누어진다. 나이가 들수록 부지런히 움직이며 힘든 이웃을 돕고 더불어 사는 법을 몸소 실천하여 청소년에게 모범을 보여 주는 이들이 발효(醱酵, fermentation)권에 해당된다.

물속에 있으면서도 목말라 하면서 늘 갈증 상태로 이기심이 꽉 찬 과욕의 노년층은 부패(腐敗, putrefaction)권에 속한다고 판단된다.

11월은 죽음을 묵상하는 달이다. 올해 11월 11일 오전 11시 코리아 부산을 향해 1분간 묵념하는 캠페인이 전세계적으로 베풀어졌다. 부산 유엔 기념 공원에 잠들어 있는 6.25 참전 용사를 추모하는 ‘부산을 향하여(Turn toward Busan)’ 행사에 세계인이 동참하는 범세계적 행사에 의미가 깊었다.

11월 11일은 세계 1차 대전 종전일이다. 호주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에서는 이날(Remembrance Day)에 묵념의 시간(a moment of silence)을 갖고 호국 영령을 추모한다.
이날 호주에서는 양귀비꽃(poppies)으로 현충일 기념행사를 한다. 전쟁 중에 숨진 병사들의 붉은 피를 상징하기 위해 양귀비 꽃을 전시한다.

인생의 죽음도 자연의 이치이자 신의 섭리다. 그러니까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정의할 수 있다.

1528년 교황의 인준을 받은 로마 가톨릭 카푸친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인사를 나눈다. "당신의 죽음을 묵상하라"라는 의미이다.

카푸친 출신 수도사가 묻힌 납골당에는 "우리도 당신과 같았다. 머지 않아 당신도 우리와 같아 질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커피의 종류에서 카푸치노(Capuccino)는 많은 사람들이 선호 하는 커피다. 유럽 스타일로 원두커피를 고온으로 압축해서 만드는 카푸치노는 우유 섞인 커피에 계핏가루(혹은 코코아 가루 )를 뿌린 커피이다. 카푸친 수도회에서 유래한 카푸치노는 이들 청빈의 상징인 두건이 달린 원피스 모양의 옷 모습과 진한 갈색 커피 위에 우유 거품을 얹은 모습이 수도사들의 두건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우리의 의식을 감성 상태로 만들어 늘 깨어 있는 의식을 갖도록 하면 어떨까?

이 달은 1년의 종말이 아니라 성숙의 결정이다.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삶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인생의 지혜는 노년의 특권이다. 끊임 없이 사건을 겪고 선택을 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닌가?

11월이 오면 나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 아래 감나무 가지에 매달려 차갑게 익어가며 낙하를 기다리는 홍시가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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