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 안녕하세요. 더워지는 날씨에 모두 건강하셨습니까? 오늘은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어르신들께서는 이사하실 때 뭐가 가장 힘드셨습니까?
A : 집을 구하는 게 가장 어렵죠. 여러 가지 조건을 모두 따져봐야 하니까요. 채광이랑 위치, 크기 등등이요.
P : 이사 날짜를 맞추는 일도 참 신경 많이 쓰여요. 나가는 집 날짜랑 들어가는 집 날짜가 잘 맞아야 손해를 덜 보니까요.
L : 집구하는 것도 일이지만, 짐을 싸고 푸는 것도 큰일이에요. 전부 주부들 몫이니까. 애들이야 학교 끝나고 새집으로 들어오면 되지만, 우리는 밤새 짐 싸고, 며칠 동안 짐 푸느라 못 쉬었어요. 
H : 호주에서 이사하는 게 한국보다 더 어려웠던 거 같아요. 한국은 집주인이랑 세입자만 조건이 맞으면 금방 계약이 이루어지는데, 여기는 내가 아무리 마음에 드는 집이 있어도 신청서를 내고 결과를 기다려야 되잖아요. 집 한 번 보러가는 것도 주말에 따로 정해진 시간을 따라야 되고, 가 보면 집 보러 온 사람들이 바글바글 해요.
A : 맞아요. 애들이 많아도, 애완견을 키워도 조금 집구하기가 어렵죠.
T : 맞습니다. 그럼 세입자와 집주인을 중재해서 서로 간의 계약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L : 공인중개사 분들이죠. 
P : 우리 젊을 때는 복덕방 주인이라고도 했어요. 지금이야 수수료라고 하지만, 그때는 복비라고 했지요. 아휴...진짜 오래 전이네요.
T : 아주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그럼 복덕방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H : 해방 이후가 아닐까요? 해방 이후에 새로운 제도들이 많이 생겨났잖아요.
L : 자세히는 몰라도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 같아요. 1950-1960년대 이후? 그 때 젊은 사람들이 돈 벌러 서울로 많이 모여 들었잖아요. 그래서 복덕방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T : 사실 복덕방은 조선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럼 복덕방(福德房)의 뜻은 무엇일까요?
A : 와! 그렇게 오래 되었어요? 글씨를 보니 한자로 복(복)자에 덕(덕)자가 들어있네요.
T : 네, 맞습니다. 바로 ‘복’과 ‘덕’이 생기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시대 선비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생기복덕(生氣福德)’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기복덕’은 예부터 오늘의 일진과 길흉을 예측하는데 사용하던 것인데, 길일을 택하는 데 기초가 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복’과 ‘덕’이라는 글자를 따서 거래 당사자들에게 복과 덕이 생기도록 중재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복덕방’이 되었던 거죠. 그럼 어떤 사람들이 복덕방을 운영했을까요?
H : 요즘이야 공인중개사 하시는 분들이 그 쪽 분야를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잖아요.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그런 게 있었을까요?
L : 장사를 하는 상인들이 물건 팔듯이 겸해서 하지 않았을까요?
T : 조선 후기 복덕방 주인들은 그 지역에서 오래 살아서 지역의 특징과 사람들을 속속들이 아주 잘 아는 노인들이었습니다. 
P : 어머! 듣고 보니 그래야 될 것 같아요. 지금처럼 기계나 컴퓨터가 발달되지 않았으니까 노인들의 연륜이나 경험이 중요하겠네요.
T : 맞습니다. 그 복덕방 주인들을 조선시대에는 ‘가쾌’라고 불렀습니다. 
A : 가쾌요? 굉장히 생소한 말인데요...
T : ‘가쾌(家儈)’라는 한자의 ‘쾌(儈)’를 자세히 살펴보시면, 왼쪽에는 ‘사람’을 뜻하는 인(亻)과 오른쪽에는 ‘모이다’라는 뜻의 회(會)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즉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서로의 요구를 중재한다는 뜻이 됩니다. 
L : 아! 한자로 보니까 이해가 더 쉽네요.
T : 그러면 가쾌들은 주인과 세입자를 중재해 주고, 얼마의 복비를 받았을까요?
P : 조선시대에는 세금도 쌀이나 그 지역의 특산품으로 내지 않았나요? 그러니 물건으로 복비를 주지 않았을까요? 예를 들면 계란이나 감자 등등이요.
T : 맞습니다. 조선시대 초기 ‘가쾌’들은 사실 이익을 창출하는 전문 직업인들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중개비로 담배 한 갑 정도를 받고, 좋은 일을 소개했다는 뿌듯함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H : 대신 가쾌들은 수완이 아주 좋아야 될 것 같아요. 아는 사람도 많고, 나름대로 인품도 좋아야 될듯해요. 그래야 사람들이 믿고 거래를 하지 않을까요?
T : 아주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쾌들은 쉽게 비유하자면, 시골 농가의 ‘이장님’같은 분들이 맡아서 했던 거죠. 
A : 그럼 언제부터 가쾌가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바뀐 건가요?
T : 1893년 이후,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오면서 가쾌의 역할이 많아졌습니다. 혹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을 보셨습니까? 시대적 배경이 어떠했는지 편하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L : 그 때 조선에 미국이나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일본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죠. 드라마에서 미국 군인들이랑 일본 군인들이 충돌하는 장면도 있었어요.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고 양반집 규수가 총잡이가 되잖아요.
T : 맞습니다. 그 당시 갑자기 물밀 듯이 들어오는 외국인들이 거주할 집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각 나라의 공사관으로 써야 할 건물도 많이 필요 했고요. 그래서 토지나 건물의 무분별한 매입을 막고 책임 있게 중개 활동을 하기 위해서 가쾌 인허제를 도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공인중개사의 시초가 됩니다. 
P : 동네 노인이 담배 한 갑 공짜로 얻고 슬슬 놀면서 두루뭉실하게 하던 일인데, 갑자기 전문직으로 바뀐 거네요. 
모두들 : 하하하!! 
T : 오늘은 이렇게 조선시대 공인중개사, 가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재미있는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영미
고교 및 대학 강사(한국) 
전 한국연구재단 소속 개인연구원
현 시드니 시니어 한인 대상 역사/인문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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