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무릎연골에 이상이 생기고부터는 외출할 때마다 신발 고르기로 전쟁을 치른다. 패션의 완성은 신발이라고 장담하던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 모양도 컬러도 뒷전이다. 오늘은 모처럼 모임이 있는 날이다. 통바지에 파란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파랑 하이힐을 꺼내 보지만 역시 불편하다. 이것저것 대보다가 결국 코가 뭉툭하고 굽이 납작한 검은 구두를 꺼낸다. 어느새 수녀님 신발 같은 느낌의 이 구두가 내 유일한 외출용 신발이 되어버렸다. 인생의 절정이라 여기던 20대를 정점으로 조금씩 내려앉은 구두 굽 높이가 어느새 바닥에 닿은 것이다.

재작년 휴가차 한국에 갔을 때 하이힐로 한껏 모양을 내고 인사동을 갔었다. 점심 약속을 마치고 강남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발이 영 불편했다. 종로 3가 역으로 가는 사이 통증이 심해지더니 지하도를 내려갈 때쯤엔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뒤꿈치에 이미 물집이 터져 벌겋게 속살이 드러났다. 절룩거리며 지하상가 신발가게로 들어가 운동화는 말고 편안한 신발을 달라고 주문했다. 점원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간호사나 비행기 승무원들이 찾는 신발이라며 아무 장식이 없는 단순한 모양의 까만 구두를 내어 주었다. 신발은 정말 맞춘 듯이 꼭 맞았다. 스타일은 좀 구겨졌지만 저렴한 가격에 만족도가 높아 뿌듯한 마음마저 들었다.
한국에도 내게 이렇게 잘 맞는 신발이 있었다니 신기했다. 어릴 적부터 신발을 살 때마다 전쟁을 치렀다. 볼이 유난히 넓고, 볼 넓이에 비해 길이가 짧고 두터운 편인 내 발은 한국인의 전형적인 발 체형에서 많이 벗어났다. 새 신을 살 때마다 스트레스를 먼저 신어야 했다.  
대학을 입학하고 두어 달 후에 맞은 첫 축제, 엄마가 나보다 관심이 더 많았다. 축제 파트너를 소개받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를 데리고 전야제에 입을 옷을 사기 위해 양품점으로 향했다. 살구빛 하늘하늘한 천에 흰 나뭇잎 모양의 패턴이 잔잔히 박힌 여름 투피스를 골라 주었다. 달리 조언을 받을 만한 곳이 없던 나는 첫 딸의 첫 축제를 자신의 것인 양 함께 하려는 엄마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얀 바이어스 리본이 목 아래에서 다소곳이 묶여 있던 살구빛 투피스가 아직도 선명한 것은 엄마가 이 옷을 내게 입히면서 즐거워했던 기억 때문이다. “키가 크고 날씬하니 뭐를 입어도 이쁘네, 이뻐, 이뻐.” 아줌마 취향의 양품점 옷들이 내게 걸쳐지면서 젊어지자 키가 유난히 작은 엄마는 대리 만족하듯 감탄사를 뽑아냈었다. 
이제 구두를 고를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단골 가게에는 245 사이즈를 신는 내 발에 맞는 신발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맞는 구두가 있으면 영락없이 시꺼멓고 볼이 넓적한 둔탁한 모양이었다. 당시 한국 여인들의 평균 사이즈가 230에서 235였다는 자료를 생각하면 모양을 따지기 전에 맞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사야 할 형편이었다. 편안하게 맞는 신발을 만나면 색깔만 바꾸어 2개씩 사곤 하는 습관은 이때의 트라우마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제 아비를 닮아 그렇지. 여자애가 하필 그런 걸 닮아가지고….”
엄마는 엄마의 기대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자 나보다 더 속상해했다. 
“엄마가 날 낳았지 내가 날 이렇게 만들어서 나온 건 아니잖아?”
괜한 자존심이 다쳐 그냥 뛰쳐 나가고 싶은 울화가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엄마는 갑자기 동네에서 한 정류장 떨어져 있는 주안사거리 수제 양화점으로 길을 잡았다. 평소 알뜰장이 엄마의 행보는 아니었다. 뭔가 결연한 기세에 눌려 마음을 찌푸리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데 4월의 햇살은 왜 그렇게 화사하던지. 
리본이 달린, 굽이 콧대처럼 도도해 보이는 아이보리색 가죽 구두를 정하는 동안 엄마는 틈틈이 가격을 흥정했다. 본을 뜨기 위해 올려진 넓적한 발을 내려다보던, 딸의 무안한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엄마의 극성 덕분에 축제 하루 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어 보는 하이힐이 내 발에 장착되었다.  
5월의 교정은 지루하지 않은 초록과 보랏빛 축제의 꽃이 만발했다. 나는 하이힐 높이만큼 공중에 떠서 춤을 추듯이 걸음을 내디뎠다. 발밑에서 양탄자처럼 보드라운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내 인생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절정이란 말에는 짧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동아리 방에 들러 보도 사진전 준비를 돕고 파트너를 만나러 가는 길에 발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뒤꿈치가 쓸리는 것 같아 앞쪽에 힘을 주면 발가락이 조여오고, 뒤쪽으로 발을 밀면 뒤꿈치가 아파졌다. 전야제 초청 공연 동안은 구두를 살며시 벗었다 신었다 하면서 견뎠는데 공연이 끝나고 일어서자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교양을 지키느라 끽소리 한번 못 내고 2차까지 따라갔다가 집으로 오니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핑크빛 축제 소식을 기대하던 엄마에게 한바탕 푸념하고, 엄마는 구둣가게 아저씨를 비난하면서 축제의 첫날을 서로를 공격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호주로 이주해서 좋았던 중의 하나가 신발이었다. 호주 사이즈 7.5 나 8이 내게 맞는 크기인데 얼마나 다양한지 신발 천국에 온 것만 같았다. 나는 한동안 한풀이라도 하듯 굽 높은 신발을 사 날랐다. 그렇게 사 모은 신발들로 두 개의 신발장이 꽉 찼지만, 무릎에 이상이 오면서 대부분이 그림의 떡이 되었다. 운동화나 굽 낮은 신들이 속속 들어앉으며 신발장은 더 복잡해져만 가고 있다.  
삶의 욕구들이 내려앉기 전에 신발 굽이 먼저 내려앉았다. 생머리를 하고 짧은 치마를 입어보지만 바닥에 닿은 굽은 올라 올 줄 모른다. 이제는 하이힐을 신고 무모하게 걸을 용기도, 스타일 구겨질 것이 염려되어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잘 보일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 신게 될지 모를 그날이 한 번쯤은 다시 올 것만 같아 굽 높은 신발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심장의 굽은 여전히 높은 언덕에서 내려오기 싫은 것이다.

유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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