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

오늘은 그림 하나를 감상하며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이 그림 보신 적이 있으시죠?
이 작품은 아마도 포스트모던적 현대 사상을 대변하는 그림이 아닐까 여겨진다. 필자는 화가도 아니고 미술 평론가도 아니기에 이 그림이 가진 진면목을 다 표현해 낼 수는 없겠지만, 이 그림이 시사하는 바와 현대 사상의 접목점에 대한 기독교적 반성을 해 볼 수 있는 있겠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년)는 흔한 파이프를 그려 놓고는 아래에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놓았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 속의 대상은 파이프가 맞지만, 화가는 관습적 사고방식의 허상을 환기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림과 문장을 모순적으로 표현하였는데 즉, 화가가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르네상스 이후 계몽기와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형성된 ‘자연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겨 놓는 것’을 최고의 그림으로 여기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 당황스럽겠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보이는 화폭 속의 대상물이 파이프 자체가 아니라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만약 진짜 파이프라면 담뱃불을 붙일 수 있어야 하고, 또 어찌 파이프가 자기 혼자 덩그러니 허공에 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저 그림속의 파이프를 만지면 목재질의 파이프 질감이 아니라 물감 묻은 캔버스의 투박한 천자락을 만지는 느낌일 일 것이다. 

이런 생각들, 즉 기존의 옳다고 받아들여 지던 모든 관점들을 한 번 ‘그것이 정말 그러한가?’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서 현대 사상이 발전하고 정리되고 있다. 그러면서 각자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개발되고 그것이 적극적으로 현대의 마케팅과 정책 결정에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식의 고고학’, ‘광기의 역사’ 등의 명저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철학자 미쉘 푸고(Michel Foucault: 1926~1984년)는 위의 마그리트의 그림을 평하며 ‘상사(similitude)’와 ‘유사(resemblance)’의 개념을 이끌어낸다. ‘유사’란 어떤 원본이나 본체가 있고 그와 유사한 제품, 작품 등을 말하며, ‘상사’란 원본이나 본체는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이 없고 대량으로 만들어지고 찍혀 나오는 비슷한 제품과 작품들 사이의 닮음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옛날에는 명품과 비슷한 짝퉁, 원본과 ‘유사’한 제품일수록 가치가 있었다고 여겨졌으며, 그래서 ‘원본/본체’는 더 없이 귀하게 여겨졌다는 뜻이다. 그에 반하여, 요즘에는 원본의 의미는 별 가치가 없고, 그 원본에서 수없이 찍혀 만들어지는 많은 서로 비슷한 제품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오직 그 ‘기능과 역할’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요즘은 아무도 삼성 캘럭시 폰이 원본이니 짝퉁이니 하지 않는다. 그저 새로 산 폰이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 에만 관심한다는 말이다.

즉, ‘유사’란 원본을 인정하고 원본의 소중함을 아는 ‘비슷함’이고, ‘상사’는 동일한 제품들 사이의 ‘비슷함’을 말하며 오직 기능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사고이다. 이런 현대철학적 사유가 각종 사회정책에 반영되고, 경제 활동에 반영되고 있는데, 그래서 잉태된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다문화 제도’이며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과거에는 토착 세력의 텃세가 엄연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내려놓고 외부로부터 오는 다른 문화와 배경의 사람들도 다 같이 일정한 권한이 있음을 인정하는 이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같은 이민자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제도인지 모른다. 이렇게 현대 사상이 사회 일반에 있어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렇게 원본의 존재를 부정하며 현재의 기능과 역할만 강조하는 ‘상사’의 시대만을 주창하게 되면, 인간은 곧 혼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인간이면 지켜야할 윤리와 도덕의 절대적 기준(원본)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발전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삭제해 버리면 인간 각자가 기준이 되고, 절대 선이 된다. 그러면 문화적이어야 할 인간은 곧 바로 잔인성과 가학적 폭력성을 합리화하게 되고, 그 힘을 제재할 어떤 구실도 잃게 된다. 

모두가 다 선이고, 모두가 다 법이 되면 누가 누구를 어떻게 통제한다는 말인가? 이런 혼란의 시대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한 분’ 구주 예수를 온전한 마음으로 따르며 그분을 기준으로 삼는 신앙을 잘 지켜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모든 인간이 다 존중받아 마땅한 위엄과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위에 홀로 영광 받으시며,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있다면 이 흔들리는 시대 가운데서도 넉넉한 평강(平康)으로 규모 있는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지 않을까? 할렐루야!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