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19로 많이 줄어들었지만 살다보면 잔치에 초대받는 경우가 생깁니다. 특정한 장소에 모여 음식을 먹고 사람도 만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먹고 마시는 것을 종종 봅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루카 5, 29)습니다. 아마 새로운 삶이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세관 레위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분을 따랐습니다. 회개지요. 레위가 그저 죄인이라 회개한 것만이 아니라, 죄의식과 비난, 손가락질하는 세간의 시선에서 처음처럼 온전히 자신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이웃사람의 집에 가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더럽다, 좋지 않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죄의식을 갖지 않고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손을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죄인이라고 비판하거나 단죄하지도, 부정한 위치 있는 자라고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난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라는 노래 제목처럼, 예수님은 늘 품고 있던 죄의식으로 자신마저 불신하던 레위를, 처음처럼 온전한 자신이 되고 스스로의 좋은 데를 알도록 불러냈습니다. 

사랑은 옳고 그르다, 맞다 틀리다 등의 말로 이루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이미 완벽한 하느님의 나라가 됐을 것입니다. 맞는 말과 맞지 않은 말이 그 사람에게 언제, 어떻게, 정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오히려 맞는 말이 상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찌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레위는 원수도 죄인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가 예수님을 초대한 잔치 자리는 저녁 만찬으로 레위의 보속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레위 스스로 준비한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식탁입니다. 우리는 이웃집의 초대를 받았을 때, 깨끗하고 잘 정리된 장소대신 쓰레기통만 뒤적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그러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5, 30)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쓰레기통에는 쓰레기만 담겨 있습니다. 마당과 안방과 사랑채의 방들은 깨끗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의 시선처럼,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모습에만 집중하는 건 편견을 만들어 냅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식사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과 왜 식사를 나누는지 한 번 더 생각하고 바라보세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루카 5, 31) 
병원이 환자를 위해 존재하듯이, 죄인으로 낙인찍혀 죄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는 야전병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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