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한 중 서울대에서 특강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양국 국민은 어려울 때마다 서로 도왔다”며 강조한 문자가 ‘상유이말’이다. 그 내용은 장자(莊子)가 길을 가다가 물이 말라버린 연못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라가는 연못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퍼덕거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자는 문득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도 물이 빠지는 연못에 있다가 같이 곤경에 처한 것인데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입으로 거품을 내뿜어 서로의 피부를 촉촉이 적셔주며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상(相 ), 젖을 유(濡), 써 이(以), 거품 말(沫)’ 즉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 있는 힘을 써서 남을 돕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이다.

물질문명의 극치를 이루는 듯한 세월은 하수상하고, 더구나 코비드-19 팬데믹 상황은 아직도 사회 전영역을 통제하여 인류를 두렵게 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듯하다. 
그런 와중에 기독교 지성의 산실이 되어야 하는 신학대학의 학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이 시대의 문제는 무엇인가?’에서 시작해서 ‘교회와 신자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등등의 문제에서 우리 신학대학은 무언가 답을, 방향을 제시하고 성도와 교회를 견인해가야 하는 작은 책임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일찍이 불교에서도 탐욕(貪慾)•진에(瞋恚)•우치(愚癡), 이 세 가지 번뇌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三毒)’이라고 경계했다. 삼독은 모두 어리석은 자신인 ‘나(我)’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자신’스스로에 미혹되어 행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우치’이고, 그 ‘우치’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맞으면 ‘탐욕’을 일으키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진에(노여움)’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해설). 

무슨 말인가? 세상이 모두 그릇된 근원, 즉 불완전한 인간(자신)이 기준이 되고, 근원이 되며 사물을 판단하며, 사람과 일들을 대해 가기에, 자기 기분과 맞으면 그것을 더 많이 누리려고 탐욕을 부리며, 자기랑 안 맞으면, 분노를 표출하며 미워한다는 것이다. 즉, 매사를 자기 중심으로, 자기가 기준이 되어 평가하고 판단하면 인간은 그 삼독의 위험에 노출되고 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차가운 기계 문명, 콘크리트 문명의 한 복판에서 가슴 저미어 오는 사랑을 꽃 피워 올리는, 그런,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기독자를 보고싶다. 나 혼자만의 염원일까? 더구나 익숙한 문화와 조국을 떠나 ‘인권과 기회의 나라’ 호주로 이민 와서 살아가는 외로운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더욱 간절한 것이 돈이나 명예보다 따뜻한 영혼을 가진 조용한 사랑의 실천자들 아닐까? 
어떤 시인은 ‘외로우니까 인간이다!’ 라고 외치기는 했지만, 불신 세상의 사람들도 ‘상유이말(相濡以沫)’을 내세우며 어려울 때 서로 도우며 살자고 외치고 있다. 
근데 왜 그런 삶이 요원할까? 굳이 불교적 용어를 빌려 설명해 보자면,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준의 잘못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기뻐하거나, 보람을 느끼거나 혹은 분노하거나 미워하는 기준이 ‘나(我)’가 되기에 그렇다는 불교의 분석은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혜안에 기초해 있다. 
여러 해 전에 ‘흙 속에 저 바람속에’, ‘축소지향형의 일본인’이란 책으로 유명한 이어령 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유럽의 개는 도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독을 지킨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탁월한 식견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영특한 것 같지만 기실은 허물지고, 불완전한 인간이 기준이 되면 그렇게, ‘진에’를 일으키거나 ‘탐욕’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인 인생 아닐까?  주님이 기준이어야 하고, 진리인 성경이 기준이어야 한다. 이렇게 창조주를 떠난 인간의 허망함이 우주의 광활한 허공을 배회하는 동안에 세상의 영혼들이 목말라 기다리는 것! 그건 다름아닌 참 사랑일 것이다. 
막 떠들거나 자랑하며 나대지 않으며 조용히 뒤에 서 있을 수 있는 용기, 잔잔히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섬겨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조그만 헌신, 서로를 먼저 배려주는 겸허한 마음, 존중히 여겨 높여주는 작지만 따뜻한 언어들! 
헌신과 수고에 대한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고 강도 만났던 이웃을 조건 없이 치유해주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던 우리 주님께서 기대하는 성도의 삶!이란 ‘나(我)’가 기준이 아니라, 주님과, 말씀이, 교회의 덕이 기준이 되는 그런 삶에 헌신하는 신자다운 신자! 그를 보고싶다. 
우리 주님께서 강조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

갑자기 설교가 되어버렸나 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상유이말’과 ‘삼독’이란 말이 오버랩되었고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이 생각이 났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주여, 우리를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로 작은 아쉬움을 마무리한다.   

김호남 목사(PhD, USyd)
시드니신학대학 한국신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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