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언론에 여러 학폭 사례가 등장하고 피해자들이 공소 시효가 이미 지나 법적 구속력이 없고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인데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어린 시절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인생내내 떠나지 않는 악몽과 같은 기억이 된 것으로 짐작하게 합니다. 이를 듣는 부모나 가족들의 마음도 아프고 사회 전체에 우울한 충격이 됩니다. 주위의 젊은 세대들에게 왜 호주에서 살기를 원하는 지 물어 보면, 여러 대답들 가운데 “자녀를 스트레스 받지 않고 좋은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 라는 공통의 답변을 듣곤 합니다. 우리 자녀들만큼은 행복하고 가치있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그저 순전한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오랜 디아스포라 역사 가운데 자녀들을 위해 목숨처럼 놓치지 않는 끈이 있다면 ‘자녀들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D 66년경 예루살렘이 로마의 침공을 받아 유대인들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군 사령관인 베스베챠누스 장군에게 당시의 랍비였던 요하난 벤 쟈카이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 당신은 앞으로 황제가 될만큼 역량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를 침공할 때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것을 다 가져 가도 좋습니다. 대신 나에게 야브네의 학교 만큼은 남겨 주기 바랍니다” 라고 요청해 약속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후에,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들로 키워 냈다고 합니다.  

다른 커뮤니티와 달리, 이곳의 유대인들은 시드니, 멜번 등 큰 도시에 19개의 유대인 사립학교(Jewish Day School)를 세우고 자신들의 자녀들을 보내 공부시키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열심인 한인커뮤니티가 아직 정규과정의 학교가 한 개도 없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교육에 얼마나 유별나게 신경을 쓰는 지 잘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토라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또한 각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탈무드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탈무드에 “ 누구든 한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면 그는 마치 온 세상을 구한 것과 다름없다(미쉬나 산헤드린4:5)”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지침을 따라서 각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결코 한 명도 포기할 수 없다는 정신을 교육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어느 누구도 소중하게 여기겠다는 강한 의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학과 성적이 좋은 순서로 등수를 매기고, 이것으로 모든 것에 우수한 사람이라는 도식(1/20)으로 평가를 하곤 합니다. 유대인 학교의 교목인 랍비에게 학생들의 등수에 대해 물으니, 반 학생 20명 학생 모두가 일등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각자가 자기 만의 분야에서 일등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 학문적인 우수성이 평가되는 것도 한 부분이지만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더욱 소중한 것을 학교에서 실천하는 일면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각 사람의 마음은 각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른 것 처럼 서로 다 다르다 (버락호트58a).”는 베벨로니안 탈무드와 “ 내가 만약 그 어느 사람인 것처럼 애쓴다면, 과연 누가 나와 같을까?” 라는 이디쉬 격언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창조 이야기가 담긴 토라의 첫번 째 책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는 구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곧 창조주의 형상이 모든 사람에게 각각 담겨 있다는 인식입니다. 이 말은 창조주의 신적 형상이 인간에게 내재한다는 것과 그 만큼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거리를 다니다보면 검은 옷을 입은 종교인들이 구걸을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하게 됩니다. 구걸할 때 맞는 획일적인 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흔히 기죽고 힘없고 처량해 보이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구걸하는 유대인들은 참으로 떳떳하고 기가 세 보입니다. 비록 구걸은 하더라도 자선을 베푸는 상대 보다 내가 못하거나 가치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투철한 신적 자존감이 있나 생각하게 됩니다. 비록 돈이 없어도 비굴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의 부나 세상의 가치 기준이 생명의 신적 가치를 우선할 수 없다는 멋진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19세기의 유명한 현자 랍비 이스라엘 살란터(1810-1883)라는 인물이 구두 수선공의 집에서 밤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늦은 밤 꺼져가는 촛불 옆에서 일하고 있는 수선공에게 “ 밤이 깊고 촛불도 꺼져가고 있는데 왜 일손을 멈추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구두 수선공이 별 미동도 없이 “ 양초가 타는 동안에는 수선이 가능하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살란터는, 양초가 타고 있는 한,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아직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고 수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관계가 틀어진 사람과도 잘못된 사업도, 내 성격의 미흡함도, 가정의 분란도 고칠 수 있다는 각성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있다면 언제든 소망이 있습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우리 자신과 자녀들이 그 소중한 이유입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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