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역사 속에 많은 박해와 끔찍한 핍박을 경험했지만, 상당히 유머가 많은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탈무드의 현자들은 유머의 가치를 높이 평가합니다. 세대를 거듭해 인생의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는 상황 속에서도 유머로 억압된 나그네와 포로된 거친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탈무드는 “슬픔의 눈물은 눈에 해롭고, 대신 기쁨의 눈물은 아름답고 눈에도 좋다.(샤밧,151b-152a)” 라고 표현 했습니다. 슬프지만 울지 않고 대신 기쁨을 찾으려고 애쓴 흔적이 담겨 있는 말로 느껴집니다.  

현자들은 한 마디의 재치있는 위트로 긴장을 풀게하고 슬픔을 이겨내고,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실제 우리가 종교적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은 엄격하고 경직될 것 같지만 오히려 농담을 즐겨하고 여유롭고 심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타협않고 강직한 사람을 대쪽같은 사람이라며 좋은 점수를 주곤하지만, 유대인들은 “사람은 삼나무처럼 뻣뻣해서는 안되며, 항상 갈대처럼 유연해야 한다(타아닛20a-b).”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익히 알고 있어서인지 그들은 쉽게 상대의 감정을 상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즐거움과 여유로움을 쉽사리 빼앗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회당에 행사가 있어 다른 일들을 서둘러 정리하고 바삐 간 적이 있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 랍비가 저를 보며 “얼굴이 왜 어둡냐?”고하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위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걱정 하지마세요!”라면서 큰 손으로 제 어깨를 감쌀 때 내심 마음을 들킨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표정 관리가 안됐었나하면서 무엇  때문에 심각했지 하고 생각해보니 별일도 아닌 사소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쉽게 즐거워야 할 마음을 작은 일에 빼앗기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즐겁게 웃는 것을 적극 장려하면서도 유머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조롱하는 것 외에 사람을 조롱하고 비방하는 것을 댓가로 웃으며 즐거워 하는 것은 심각한 죄”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냉소주의는 사회의 기생충과 같다’ 라고 하며 사람을 냉소적이며 비판적을 대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현자들은 “사람은 심각하고, 신은 웃으신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아인슈타인도 “신 앞에서는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현명하고 또 동일하게 어리석다”라고 말했습니다.  

탈무드는 성경에서 모든 생명은 행복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유를 가정과 출신의 배경과 전혀 상관없이 개개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피조물 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내가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가정과 가난과 학벌과 환경은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손상시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 격언은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케투봇111b)”고 강조 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을 쾌활하게 맞이하라”(아버지의 윤리1:15)는 랍비 샴마이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우울함과 침체된 분위기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심지어 ‘죄악’이라고 강조합니다. 

1930년 독일에서 살았던 한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요하난 벤 자카이가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넸다(바벨로니안 탈무드 베라콧17a)”는 것을 일상에 실천하고 살았습니다. 매일 아침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먼저 밝게 인사했다고 합니다. 한 동네에 농부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도 늘 “좋은 아침입니다. 밀러씨” 하고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럽에 전쟁이 일어나고 랍비는 아우슈비츠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스실과 강제 노동장으로 보내기 위해 줄을 세운 어느 아침에 ‘오른 쪽으로, 왼쪽으로’ 나치 장교의 목소리가 들리고 점점 그 앞으로 갈수록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바로 한 동네의 농부 밀러씨 인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아침 입니다. 밀러씨” 하고 인사를 건네자 장교도 “좋은 아침입니다. 랍비님”하고 인사를 하면서 지휘봉으로 “오른 쪽으로”라고 말했습니다. 랍비는 극적으로, 더 안전한 수용소로 이송되고 전쟁 후에도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가 베푸는 친절과 미소가 진심인가를 판가름하려고 하고 내가 정말 즐거운 마음인가를 미심쩍어하며 먼저 내미는 친절에 주저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가 즐거워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내면에 내 행동을 주저하게 하는 잠재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종교성을 가질수록, 나이가 들어 갈수록 좀 더 금욕적이고, 근엄하고 절제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들을 은연 중 하게 됩니다. 하지만 탈무드는 금욕주의를 종교의 경건성과는 구분하며 과감하게 즐겨야 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미래에는 눈으로 보기만 했고 먹지도 않은 좋은 것들 모두에 계산해야 할 지 모른다(팔레스타인 탈무드, 키두쉰4:12)”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주어진 모든 것을 미루지 말고 잘 먹고 지금 즐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른들이 젊은 자식들을 위해 내 주는 것이 희생이고 덕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이모니데스는 “누구에게도 허용되는 것을 자신에게 금지 시키려는 맹세나 서약을 해서는 안된다(미쉬네토라, 성격과 윤리 행동의 법3:1)고 말하며 지나치게 자신을 제약하는 것이 행복과 기쁨을 빼앗기는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인생관은 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즐기고 또 즐기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즐거운 한 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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