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팬데믹이 선포되면서 다른 커뮤니티와 달리 유대인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 있다면 기부하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일 겁니다. 특별히 한 사회 자선기관이 독특하게 가동되고 있는데, 그 이름이 JEMP(Jewish Emergency Management Provider), 곧 ‘유대인 긴급 관리 준비처’로 해석되는 단체입니다. 

이 기관은 과거 1997년 이스라엘의 마카비 게임에 참석했던 호주 선수단 중 4명이 사망하고 60여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과 1998년 Bailik 칼리지에서 17세 학생이 많은 동료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자동차에 치는 테러를 목격하면서 설립의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 되었습니다. 이번 팬데믹 기간에 여러 응급 상황에 투입되고 노인들이나 허약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 여러 기관이 연합해서 기부하고, 일반인도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하여 기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인 사회에는 많은 사회 봉사 단체들(JCA, ECAJ, JBOD,UIA, ZIONIST FEDERATION 등)이 있는데 생각보다 큰 규모의 자선 활동들을 도모하고 있어 과연 유대인들의 자선은 구호가 아니라 생활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대인의 자선은 ‘체다카(정의)’라는 뜻의 히브리어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유대인에게 있어 정의(Justice)의 실천이 바로 자선에 있다고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토라에서 ‘정의를 따르라’(신명기16:20)는 말은 곧 ‘자선을 행하라’는 말과 동일하게 취급합니다. 그래서 ‘체다카’는 다른 모든 계명을 합한 것과 대등하다(바바 바스라9a)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과 악인의 기준을 바로 ‘자선’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선을 하지 않으면 악인이다’ 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여느 사람들이 여유가 되면 기부를 하는 것과는 의무감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신명기서에는 “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15:7-8)”. 그리고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 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명기15:11)”하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랍비 이스라엘 살란터(1810-1883)는,
“사람은 모름지기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인 것이 곧 영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고, 러시아 종교적 실존주의자로 알려진 니콜라이 버르디야에브(1874-1948)도 “나에게 빵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빵의 문제는 영적 문제일 수 있다”라고 같은 맥락의 견해를 그의 시대에도 피력했습니다.  

탈무드는 ‘자선을 베푸는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면 친절’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돈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여질 수 있지만, 친절은 가난하거나 부자인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선은 산 자를 위한 것이지만 사랑의 친절은 산 자와 죽은 자(가난하게 죽은)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2세기의 저명한 랍비, 마이모니데스는 자선을 8단계로 구분 했습니다. 
1단계: 스스로 존속할 수 있도록 돈, 일자리를 마련해 주거나 사업을 함께 하는 일
2단계: 누가 주는 지, 누가 받는 지 모르게 행하는 자선
3단계: 주는 사람은 알지만 받는 사람을 누구 도움인지를 모르는 자선
4단계: 받는 사람은 누구로부터 받는 지 알지만, 주는 사람은 누가 받는 지 모르는 자선
5단계: 부탁 전에 돕는 자선
6단계: 부탁 후에 돕는 자선
7단계: 필요한 것 보다 적은 금액을 기쁜 마음으로 주는 자선
8단계: 싫은데 억지로 하는 자선 - 마지못해 하고 증인이 보는 앞에서 감사를 기대하는 사람

많은 이들이 어쩌면 8단계의 자선을 하고 생색을 내는 일들을 많이 하고 있지 않나하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마이모니데스는, “비록 8단계의 선행을 베풀어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고 합니다. 가장 높은 경지의 선행은 죽은 자에게 베푸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로부터는 아무 것도 되돌려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탈무드는 ‘인간이 현세에서 갖고 있는 것은 신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짧은 생애동안 사람을 거쳐갈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워렌 버핏,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록펠러, 소러스 펀드 회장같은  유대인들이 뉴욕의 ‘기부 서약’에 동참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 기부금의 45%는 유대인들에게서 나온다고 합니다. 금전적인 면에서 신뢰가 가는 사람 만이 종교적으로 신실하다(랍비 츠비 히르슈 코이도노버.1712사망)는 말처럼, 그들은 세속적인 유대인들이지만 자선을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을 실천하고 토라의 명령도 충족시키고 있다고 보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뒤통수를 보며 자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의 삶의 이면의 것들을 보고 배운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내가 감추고 싶은, 실천하지 않는 외식의 부끄러운 내면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토라를 실천하는 것의 여부는 회당이 아니라 시장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지에 달려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왠지 글을 쓰는 제 자신도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유월절과 부활절을 맞으며, 힘들어 하는 이웃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다면, 한 발짝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기쁨의 한 주간이 되리라 스스로 위안해  봅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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