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놀드 토인비라는 역사 철학자는 ‘인류의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사는 데는 피할 수 없이 어려운 일들이 다가오고 또 대응하는 것에 따라 역사는 쓰여져 왔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평탄한 인생을 살기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소원이지만 고난이 올 때 현명한 대응은 미래를 달라지게 하는 중요한 선택이 될 수 있음에도 좋은 팁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들로 매일 고민하고 염려하며 살아가고 때로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칠까 납득이 가지 않는 억울한 일들을 겪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도 여러 역사적 고난이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근대의 가장 큰 고난이 있었다면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홀로코스트는 ‘번제물’이라는 뜻으로 2차 세계 대전시 약6백만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강제 수용소에서 가스나 총으로 죽어 화장터에서 태워져 재가 되게 한 대량살상 참사를 말합니다. 유럽에 팽배했던 반유대주의와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등장하며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을 동원해 기획하고 기계적으로 특정 민족을 대량으로 말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거쳐 20세기에 일어 났다는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우리는 책이나 영화로 이야기처럼 알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대인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모든 유대인들의 피부에 직접 와 닿는 상처와 슬픈 역사의 흔적으로 각인되어 있고 민족적 결속력을 갖게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된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 이 일은 역사 안에 충격적인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자식들과 아내와 남편과 부모가 눈앞에서 매를 맞고 강간을 당하고 죽어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무기력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며 소망했던 생존의 기대감은 칠흙같은 절망이 되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두 상실되고 생존을 위한 수용소 안의 처절한 삶은 신의 존재에 대한 불신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홀로코스트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은 신앙을 잃게 되었고 정체성의 상실과 생명과 존재의 가치에 대한 혼동과 트라우마에 휩싸였습니다. 유대교의 진보주의자들은 ‘신은 역사 가운데 일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의 죽음’이라는 운동으로 ‘정의와 도덕과 인간의 고통에 관여하는 개인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엘리저 벌코비치 -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앙)”고 주장했고 많은 반향을 얻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강성 랍비들은 “이것이 세상에 동화하며 독일에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가게를 열고 비즈니스를 한 죄에 대한 분노하신 하나님의 벌(랍비 사피라, 타이테 바움, 밀러 등)”이라고 가혹한 각성을 지적했습니다. 

반면에, 이런 유럽의 유대인들을 향한 비판에 대해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히틀러의 변태같은, 백정같은 짓이 끔찍한 고통과 죽음을 몰고 온 것에 대해 어떻게 합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랍비 노만 램)”라는  ‘죄와 벌’에 대한 의견의 간극이 생겨났습니다. 
랍비 어빈 그린버그는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죽이고, 삶아서 비누로 만들고 머리 털로 벼게를, 뼈가 비료가 되게하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버려진 그들의 무덤에 대해, 신학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비존엄과 죄로 인한 결과라는 비난으로만 남겨지게 하고 있다.”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는 “어린 자녀의 몸뚱이가 불 타고 있는 현장 앞에서 어떠한 말과 신학적 견해도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과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일들이 생길 때 나의 죄 또는 조상의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비난한다면 과연 그것이 설득될 수 있는 말일까 반문하게 됩니다. 에밀 화큰하임이라는 철학자는 이러한 유대인 지도자들의 신앙의 간극에 대해,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략을 상기하며 유대인들에게 614번째의 계명(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지키는 613개의 계명에 한 개를 더해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소멸되지 않도록 우리는 생존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죽었다거나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는 세상이 되지 않도록, 절망의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히틀러가 죽은 후 그가 원한대로 유대인과 유대교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승리를 안기는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 속으로의 귀환’이라는 책에서 발췌)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의 현자들 간에도 고난에 대한 행동에 대해 여러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이에 대해, 유대인 현자들은 “ 두 사람이 치열하게 논쟁을 했는데, 한 명이 자기 주장을 하자 ‘당신이 옳습니다’라고 말하고, 두 번째 사람이 말하고 나면 그에게’ 당신이 옳습니다.’라고 말을 하자, 듣고 있던 랍비의 부인이 “당신은 어떻게 두 사람이 다 맞다고 말을 할 수 있냐”고 따지자 “당신의 말도 맞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고난에 대해 진정 맞는 말은 무엇일까요? 

랍비 요나 메츠거

홀로코스트와 같은 극단은 아니지만 우리는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 때 우리는 기도도 하고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그리고 극한 상황에서 현명한 대답을 듣지 못해 때로 절망을 하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현자들은 그저 생존을 위한 고통을 지나면서도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현 세대의 랍비들은 실제 홀로코스트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지난 2000년동안 사라졌던 나라가 다시금 역사 안으로 등장하고 지도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 신의 손길 임을 강조합니다. 헛된 죽음은 없고 선한 신의 섭리는 억울한 죽음을 통해서도 그의 선함과 그 이후의 나라에 대해서도 소망을 열어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랍비 마틴 부버

탈무드는 인간이 최고의 영적 존재이지만 또한 피조물이므로 창조주의 모든 생각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신은 죽은 후의 영원한 세계에서 생명의 소망을 가질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고난의 때에 소망을 가져야하는 이유는, 내가 절망하는 것을 조소할  악한 영에게 승리의 선물을 안겨 줘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도전과 고난에 대한 현명한 응전은 결국 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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