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닐까?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가 불안정한 세상에서 희망에 대한 기다림이 약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전 세계인이 불안과 혼란에 휩싸여있는 현실에서 코로나 극복의 그 날을 기다리는 심정은 절실하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완치의 그 날을 향한 기다림,
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면서 상대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기다림,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면서 성공의 그 날을 바라는 기다림이 있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재림의 어원을 보면  수난과 부활을 거쳐 종말이 온 후에야 재림이 찾아오게 된다니 인류의 종말을 예고한 듯하여 섬뜩하다. 이를 빌미로 한때 이단 교회에서는 성경(요한 계시록)을 자의로 해석하여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집단 구원을 약속하며 세상을 요란하게 소동을 벌였던 흑역사도 있었다.

기다림이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제대 날짜를 손꼽고 있는 병사들, 고시 합격 발표가 다가온 응시생들, 당선자 발표를 앞둔 출마자들과 영주권을 신청한 임시 체류자 등의 기다림은 절실하다.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좌도 보고 우도 보고 뒤도 돌아보면서 전진하는 가운데 기다림의 인내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경마장의 말처럼 앞만 보며 직진하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심경이 든다. 자신의 주장만 강변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부류다.

어제를 뒤집어 보고 오늘을 둘러보며 내일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권고한다. 부처는 "내가 왜 이러는가 궁금하면 과거를 보라. 앞으로 잘 할 수 있을까 궁금하면 지금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설파했다.

기대는 믿음의 어버이라고 한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의 기대를 걸어 놓고 그것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최선을 다 한 후에 결과를 기다린다)는 말이 있다.
서양에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근원이 명확해야 한다. 가시를 땅에 심어 놓고서 장미를 기다려서는 안 되는 이치와 같다.

세상에는 별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바다는 메워도 사람 욕심은 못 메운다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무거운 줄 모르는 사람.
공짜는 소금도 안 짜다는 사람. 호미 빌려 주니 감자 캐어가는 사람. 나 잘 되는 것보다 남 못 되는 것 좋아하는 사람. 개구리에게 헤엄 가르칠 걱정하는 사람.(고국의 정치에 훈수 두는 동포들) 판단력이 부족하면 결혼을 하고 이해력이 부족하면 이혼을 하고 기억력이 부족하면 재혼을 한다고 주장하는 독신주의자.

이처럼 각양각색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인 것이다. 상식과 몰상식, 양식과 무식이 뒤엉켜 인간의 욕망과 본능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명약을 준비하여 매일 복용 하면 이 풍진 세상을 정화하면서 순탄하게 항해 할 수 있다.
<사랑>과 <친절>이라는 양약이다.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충전하여 남을 배려하면서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친절 >이라고 어느 철학자는 정의했다. 친절한 마음은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영국 속담에도 '친절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A kindness is never lost)'고 전해진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자.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내가 세상을,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흔히 사람을 평가 할 때 '사주팔자(四柱八字:  네 개의 기둥과 여덟 글자)'를 타고 났다는 말을 한다. 팔자가 좋다 혹은 팔자가 나쁘다는 운명론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사주팔자는 과연 무엇인가?
조선조 초기 명리학에서 유래한 학문으로 사주팔자는 12개의 지지가 각 개인의 여덟자를 만들어 낸다고 해석한다. 그런데 각 개인의 여덟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무려 20,736이며 천간까지 합해 계산하면 1,296만분의 1이 나온다. 그러므로 자신의 운명을 탐구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서양에서는 <13>이라는 숫자를 불길하게 여겨 터부시한다.
그러나 13이라는 숫자는 성스러운 숫자인 것이다. 서양 점성술에서 12개의 별 자리에 태양을 합하면 13이 된다. 예수의 제자 12명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 하면 13이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도록 해 준 여성은 1년에 13번 생리하도록 되어 있는데 월경은 생명을 창조해내는 성스러운 과업의 하나이기에  <13>이라는 숫자는 존중 받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현재 한인들은 호주와 한국이 하루속히 코로나 팬데믹 사태가 진압되어 고국 방문의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 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가슴에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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