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차에 올라타는 재형의 뒷모습을 보았다. 기차가 출발하려고 했다. 나는 급히 전화통화를 끊고 그의 뒤를 따라잡았다. 출입문에 발을 올리는데, 플랫폼과 객차 사이의 벌어진 틈이 섬뜩하도록 무섭게 느껴졌다. 재형을 찾으려고 객실 안을 두리번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또 하나의 재형이 놀란 표정으로 손을 휘저으며, 출입문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고, 소리치며 재형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나는 어금니를 앙다물고 재형의 바지자락을 힘껏 잡아 당겼다. 객차의 출입문에 낀 재형의 바지가 북, 찢어지며 빠져나왔다. 반동으로 둘은 나가떨어져 맞은 편 출입문에 부딪쳤다. 콰다당, 양철북소리를 내며 둘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토끼눈을 뜨고 구경했다. 재형의 바지는 여남은 군데 실밥이 터지고, 20센티미터 정도 단이 찢어졌지만, 그나마 그 정도라 다행이었다. 
  잿빛 흙먼지가 두 사람의 옷에 도배되었다. 숨을 고르며 급히 일층의 빈자리를 찾아서 둘이 나란히 앉았다. 그때 한 소년이 재형의 백팩 옆구리에 찔러놓았다가 부러진 부메랑 반쪽을 들고 왔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재형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그것을 받았다. 
  나는 뒷모습을 보고 재형으로 오인한 남자가 궁금했다. 자라목을 길게 빼서 객실을 270도 각도로 훑었다. 그럴 만한 남자는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카키색 바지와 버간디톤 티셔츠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까지 재형과 같았던 남자가 백인이었는지 아시안이었는지도 아리송했다.   
  기차는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찢어진 바지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게 나 때문이란 원망인지, 둘 다인지…… 불만이 가득한 재형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차가 머리를 터널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어두운 차창에 재형의 얼굴이 스쳐간다. 뭉개어진 어둠에 반사된 재형의 실루엣이 전생에서 옷깃 한번 스쳐본 적 없는 인연처럼 낯설다. 
  문득 재형과 나에 대한 승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객차의 문틈에 낀 재형의 바지가 빠지면서 둘이 포개지듯 부둥켜안고 넘어졌었다. 승객 중 몇몇은 입구까지 뛰어나와 구경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고 가자미눈으로 승객들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승객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의 액정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노란 형광등의 반향을 받으며 앉아 있는 그들은, 항성계의 성간과 성간을 이동하기 위한 암호를 풀고 있는 미래의 지구인들처럼 보인다. 
  나는 목을 좌우로 움직여 긴장을 풀었다. 그때 재형의 눈길과 내 눈길이 복잡하게 마주쳤다. 재형이 일으킨 해프닝이 생각하면 할수록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나는 재형이 기차와 플랫폼 사이에 추락한 사태를 상상해 보았다. 그러자 기분이 현실로 돌아왔다. 문득 두 사람의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가 내 눈치를 보는 것도 같았다. 나 때문에 침묵이 이어지는 것 같아서, 그동안 고집해 오던 표정관리를 해제하고 입을 열었다.  
  “여행객이 왜 혼자서 딴 눈 팔고 그래?”
  “물 한병…… 벤딩머신에 낀 코인을 뺏어야 하는 건데……, 돈이잖아” 그의 대답이 내 귀에는 불퉁거리는 조로 들렸다.  
  나는 백팩에서 물을 꺼내 재형의 손에 쥐어주었다. 재형이 물병을 입에 물면서 대화가 가능한 객실이냐고 질문하다 사레가 들렸다. 그의 입에서 분무된 물이 부채꼴로 두 사람의 팔과 다리의 맨살 위에 떨어졌다. 갑자기 조금 전의 기억과 짜증스런 기분이 자연스럽게 합성되었고, 그래서 심사가 뒤틀렸다. 뭔가 몹시 억울한 생각까지 들었다.   
  “러브레터……, 감옥의 사랑이라! 자극적이지 않아?” 그가 갑자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감옥에서 사랑하면 안 돼?” 나는 티셔츠 자락을 잡아당겨 재형의 입에서 떨어진 팔의 물기를 닦아냈다.  
  “글쎄, 그 러브레터가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감옥 ‘채플룸’의 서까래 밑에 방치되어 있었을까?” 그가 잡지사 기자답게 재빠르게 질문을 돌렸다.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고…… 최근에 내부공사를 하면서 발견됐다고 해.” 평소 내가 박물관 고객을 상대하던 식으로 대답하려고 애를 썼다.   
  감옥의 러브레터가 재형의 감성을 자극했단 점이 어쩐지 나는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내 책상서랍 깊숙이 보관되어 있는 재형으로부터 받은 연애편지 묶음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운 악마’, 첫 편지의 제목을 기억하자 피, 웃음이 터졌다. 고작해야 도서   대출카드 양면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하게 적은 쪽지에 불과한 것이지만. “하, 사랑스러운 악마 좋아하시네. 사랑의 악마는 시간의 빗자루를 타고 마녀로 진화하고, 또 다른 시간은 귀여운 마녀에게 독이 발린 손톱을 달아줄 텐데.”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길게 뺐다. 오늘 새벽 6시 7분 뉴캐슬발 기차를 타고 도착한 시드니에서, 달링허스트 감옥(Darlinghuster Gaol)을 관람하고 돌아가는 길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시계를 보았다. 기차를 탄 시간부터 계산한다고 해도 장장 13시간이 소모되었다. 그것을 노동시간으로 환산해보다, 현실적인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명치가 따가웠다.   
  긴 하루였다. 한 개의 터널을 통과했으니 나머지 여섯개를 통과하면 집이 있는 도시 뉴캐슬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오늘 새벽, 재형이 묵고 있는 호텔의 주차장에서 그를 기다리며 하현달을 올려다보는데, 불현듯 내가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진 이유가 뭘까? 
  기차가 두 번째 터널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앉아 있는 지금의 객실도 만원이지만, 오늘 새벽의 객실사정에 비할 바는 아니다. 형광등이 짙은 노란빛에서 희미한 노랑으로 탈색하며 전율한다. 나는 다림질 하듯 엉덩이를 앞으로 쭉 빼서 등을 길게 폈다. 재형이 스마트폰에 연결된 무선키보드를 두드려 ‘감옥의 예술’을 지우고 ‘감옥의 사랑’으로 기사 제목을 고치고 있다. 그가 에어컨이 가동된 객실의 냉방에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백팩에서 잠바를 꺼내 걸친다.  
  피곤하다. 재형도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렸는지 게슴츠레 눈이 감긴 상태다. 기차가 터널에서 빠져 나오자 차창을 뚫고 들어온 한 여름 석양빛이, 재형의 고어텍스 재킷에 무심하게 떨어진다. 마른 몸매, 큰 키, 나오지 않은 배, 각진 턱은 예전 그대로다. 옛날에도 그는 옷을 잘 입었다. 그는 한 때 그 나름의 고상한 방식으로 멋있어 보였었다. 키보드 위에 놓인 두 손등의 불거진 힘줄만이, 그도 늙어 간다고 힘주어 외치는 것 같다.  
  잠시 후, 코를 골며 입까지 벌리고 잠이 든 재형을 멀뚱히 쳐다본다. 내 발등 위에 떨어진 그의 찢어진 바지자락으로부터 나는 발을 가볍게 당겼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주택의 울타리에 줄지어 서 있는 꽃나무를 응시한다. 세 가지 색의 꽃잎을 한 나무에 매달고 있는 꽃나무가,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갈 때면 잠시 얼굴을 숨겼다가, 기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얼굴을 내밀어 시선을 잡아당긴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이름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꽃잎은 짙은 보라색으로 피어나, 옅은 라벤더색으로 변하고, 마지막엔 흰색으로 탈색해 낙하한단다. 꽃잎의 탈색과정을 문장으로 좀 더 잘 은유해 보려고 혀를 굴려보자, 문장이 입안에서 꼬이다 지워져버린다. 말이나 글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꽃의 은밀함, 사랑의 여정?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피, 웃고 말았다. 
  나는 다시 한 번 피식 웃었다. 17년 만에 만난 재형에 대한 내 기분을 묘사할 길이 막막하다. 과거와 현재를 한데 묶어서 재형의 이미지를 그려내려고 애써 보지만, 그 어떤 의미지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떨어져 살았던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에게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겠지만, 그것들은 결코 내 인생의 시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에로틱했던 기억들은, 천연소재 속옷을 표백처리 한 것처럼 탈색되어 버렸다. 캠퍼스에서 손을 잡고 다니던 둘의 사랑이 은밀한 행위로 진화하고, 수없이 주고받은 몸의 기억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자메뷰현상으로라도 남아 있어야 할 기억들이 그의 면전에서조차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들끓어 올랐던 에로틱한 순간들이 생리작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쳐도, 기억에는 남아 있을 것 같은데.
  그러함에도, 가끔 하릴없는 마음에 등대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 구두를 벗어들고 두 짝의 바닥을 마주 박박 문질러대며, 문득문득 재형을 생각했던 내 모습은 기억할 수 있다. 때로는 쌍무지개를 올려다보며, 문득 문득 재형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던 모래사장의 쓸쓸했던 내 실루엣은, 그가 남긴 편지처럼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성적인 긴장감은 탈색된 속옷 같아졌지만, 그의 편지는 어제 읽은 문장처럼 기억할 수 있다. 허구, 속임수, 신기루…… 환상만 기억하고 구차한 사실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간의 심리인가. 기회를 봐서 재형이 내 편지를 보관하고 있는지 물어볼까? 아직도 내 편지를……? 나는 컥, 웃었다. 재형이 내 헛웃음 소리에 번쩍 눈을 뜨더니 그대로 다시 눈을 감는다.  
 기차가 세 번째 터널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빛이 파르르 떨고 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새근새근 잠든 재형의 숨소리가 들린다. 꿈이라도 꾸는지 재형이 손을 뻗어 내 무릎에 올린다.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그 바람에 충격을 받은 스마트폰의 자막이 살아났다. ‘감옥의 사랑’, 오늘 새벽의 사건이 날아간 앱을 복구한 것처럼 기억위에 떴다. 물론 13시간 전의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건일 터이지만. 
  우리가 목격하게 된 사건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였을까? 재형과 나는 오늘 새벽 간신히 Quiet Carriage(조용한 객실)의 일층에 올라탈 수 있었다. 객차와 플랫폼 사이는 악어의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약간만 몸의 균형을 잃어도 추락해, 바퀴에 몸이 갈려버릴 것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
  어제, 재형이 호주에 도착했다. 저녁을 먹으러 그를 끌고 간 바닷가 레스토랑에서였다. 늦가을의 밤바다가 울부짖는 소리가 음흉하게 들린다며, 재형이 메뉴판에 눈을 박고 물었다. “호주 전통요리 한 번 먹어볼까?” “호주 전통요리? 그런 것 없어. 설명하려면 길어, ‘그냥 피시 앤드 칩스’나 시켜.” 나는 그렇게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미 그렇게 말해버린 후였다. 
  정작 요리가 나왔을 땐 어설픈 분위기 탓으로 재형도 나도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각자 잔뜩 신경 써서 할 말을 고르느라 제대로 음식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내 앞에는 셰리 와인, 재형 앞에는 호주산 화이트 와인을 웨이터가 놓고 갔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재형의 표정이 약간 복잡해 보였다. 대화 중간에 잠깐잠깐 말이 끊어지면, 그 사이에 둘이 경쟁하듯 술을 넘겼다. 각자의 술잔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다가, 갑자기 꿀꺽 목구멍으로 털어 넣는 식이었다. 버성긴 마음에 두 사람간의 대화가 한번 끊어지면 좀체 연결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 와이프는 어때? 아직도 귀여운 악마……?” 왜 그 소리가 불쑥 나왔는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술기운을 빌어 겨우겨우 턴 말문도, 앞뒤가 잘 맞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술만 취하는 꼴이 되었다. 떨어져 살아온 긴 세월에 대해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할 땐, 목구멍으로 술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요란했다. 침묵이 마치 내 책임이라도 되는 양, 어떻게든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려고 애쓴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은 격이 되었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후회가 막심했다. 재형은 내가 예전과 달리 쿨하게 구는 것이 새롭게 받아들인 서구문화쯤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 추측도 아주 일리가 없진 않겠지만. 
  남은 술을 털어 넣으며 나는 와락 현실감을 되찾았다. 달링허스트 감옥의 자료를 준비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다음날의 계획을 철저하게 준비하지 못하고 맞닥뜨리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러한 심리는 성격이기 전에, 그동안 남의 나라 말로 공부하고 다른 문화에 적응하며,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새까맣게 더께가 달라붙은 발뒤꿈치의 굳은살 같은 거였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여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혀버리게 된, 작은 일에도 고아처럼 불안에 떨고, 죄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게 되는 기이한 의식이었다. (계속)

 

테리사 리 소설가 
-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
- 11회 민초문학상 수상
- 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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