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형과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일층 객실로 들어가는 층계를 내러가고 있었다. 둘은 빈자리를 찾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였다. 나는 재형과 멀찌감치 떨어져 앉게 된 것에 안도했다. 전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보낸 탓으로 눈을 좀 붙여볼 참이었다. 내가 앉은 자리에서 두 자리 떨어진 마주보는 대각선에 여자가 보였다.  여자의 통화하는 목소리는 끈적끈적한 허스키에 숨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여자의 머리 위에서는 Quiet Carriage란 붉은 글자가 꿈틀 꿈틀 살아나서 금방이라도 여자를 덮칠 것 같았다. 한 쌍의 전갈 같은 두 단어가 여자의 정수리에 꼬리를 푹 찔러 넣을 것처럼 보였다. 정작 여자는 통화에 매달리느라 전갈의 위험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관중석엔 아랑곳 하지 않고, 혼자 차지한 삼인용의 좌석을 연극무대 삼아, 리허설을 하는 여배우 같았다. 관객들 또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려는 시도는 고사하고, 한시바삐 공연이 시작되길 초조하게 기다리는 착한 관람객처럼 안달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목을 뒤로 빼서 재형을 흘깃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꽂고 내가 출력해 준 자료를 읽고 있는 백인들 속 그의 표정이 불안해 보였다. 재형을 쳐다보느라 허리를 너무 길게 빼고 말았다. 창가에 앉은 비대한 남자의 살찐 손이 꿈틀하며 내 허리를 건드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며 진저리를 쳤다. 그 순간 내 경락들이 축축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내가 옮겨 갈 수 있는 빈자라곤 여자의 옆 좌석 두 자리와 꼬랑지머리의 옆 한 자리 뿐이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꼬랑지머리를 여자의 일행으로 간주해 버린 상태였다. 
 여자의 목소리는 코맹맹이로 바뀌어 갔다.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도 통화내용은 내 귀를 후비며 파고들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잠깐 떴다가 또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며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여자의 붉은 볼을 힐끔대며 백팩에서 달링허스트 감옥의 자료를 꺼냈다. 스테이플러가 안 된 자료는 뒤섞여 있었다. 차례를 무시하고 한 장을 뽑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옥의 채플 룸…… 하층 바닥에선 남자 죄수들이, 하현달 꼴의 편편하게 생긴 상층 갤러리에선 여자 죄수들이 예배를 보았다. 남자 죄수와 여자 죄수들 사이는 소통이 금지되어 있었고, 간수들이 엄하게 보초를 썼다. 미지의 남자 죄수가 던진 봉인된 러브 레터는 오랜 세월 쐐기꼴로 서까래 사이에서 끼어서……’  
  여자의 목소리는 내가 읽는 단어와 단어를 분절시켰다. 통화는 좀체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백팩을 뒤적거려 이어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왼쪽 귀를 막고 자료를 계속 읽으려 애썼다. 하지만 여자의 소리는 내 고막 안으로 울림을 만들어 뇌를 자극하며 독침처럼 찔러댔다. 나는 소리기피증 환자처럼 신경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달링, 내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지? 편지 받았어? 아직……? 꿀과 체리잼은? 것도 아직? 제발 믿어줘……” 
  여자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다시 자료에 집중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표적인 부시 발라드 시인이자 단편소설가인 헨리 로슨은 세 번이나 달링허스트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투옥될 때마다 감옥 안에서는 동요가 일어났다. 수용자들에게 빈약한 음식을 공급하는 것을 놓고 발라드를 써서 빈정댔다. 달링허스트 감옥을 스타빈허스트 감옥이라 빗댄 시들이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간절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통화는 그칠 줄 몰랐고, 나는 읽기를 포기하고 자료를 백팩에 쑤셔 넣었다. 도무지 차분해 질 수 없었다. 
  “달링, 기차가 미치게 느려. 기다려 달링,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돼. 잠깐 후면 내 얼굴을 보게 될 거야. 이상한 꿈……? 다시 말해봐! 죽음……? 무슨 소리야, 나는 죽지 않아, 그리고 달링을 만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여자의 통화내용은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들어도 현실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때 한 승객이 여자와 꼬랑지머리가 앉은 자리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작은 키의 빼빼마른 남자는 빈약한 가슴을 앞으로 쑥 내밀고 고개를 흔들며 비틀비틀 걸어 나아갔다.  
  “조용히 합시다. 여긴 조용한 칸입니다. 당신을 제외한 승객들은 조용하잖아요.” 승객의 목소리는 조금 높은 편이었다. 
  그때 벌떡 일어난 인물은 꼬랑지머리였다. 나는 뒤돌아선 그를 보며 아하, 한숨과 탄성을 동시에 터뜨렸다. 그가 여자라고 믿고 있었던 내 무지함에 대한 실망이 컸다. 꼬랑지머리가 키 큰 사내였다니, 내 안에서 쉬익, 김이 빠져나갔다. 누구를 빼닮은 것 같은데 누군지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꺼져, 네가 뭘 알기나 해?” 꼬랑지머리가 승객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곳은 조용히 해야 하는 거야, 어찌되었든.” 승객이 맞받았다. 
  꼬랑지머리가 폴로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자 분위기가 살벌하게 느껴졌다. 그의 육중한 팔 근육이 울퉁불퉁 움직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여자는 꼼짝없이 앉아서 통화에만 몰입했다. 한참 후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여자는 통화상태인 전화기를 삼인용 좌석 위에 살짝 던졌다. 그리고 꼬랑지머리를 밀어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사나운 눈길이었다. 
  “퍽큐! 꺼지지 못해?” 소리치며 승객의 가슴을 힘껏 밀었다. 승객이 뒤로 넘어지면서 투박한 좌석의 팔걸이에 부딪쳤다. 승객은 끙, 신음을 토하며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벌벌 떨었다. 그의 코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가 여자를 향해 주먹을 날릴 순간을 기다리며 잠시 숨을 멈췄다. 
  꼬랑지머리는 다리 하나를 팔걸이에 걸치고 앉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파란 안구가 차창 밖을 탐색하며, 으스스한 미소를 흘렸다. 승객은 코피를 닦으며 머리를 심하게 흔들기만 할뿐 대항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기대가 빗나간 것이 크게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저 꼬랑지머리는 누구며 또 여자랑은 무슨 관계인가? 
  그처럼 소란스러웠음에도 승객들은 꼼짝 않고 스마트폰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몇몇 승객이 가자미눈으로 실내를 힐끔대거나 입술을 달싹거리긴 했지만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겁쟁이들! 그들, 호주인의 기질을 나는 얼마간 알고 있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가 도로 주저앉았다. 승객은 개처럼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손으로 코를 틀어막고 자리로 돌아갔다. 소란은 막을 내렸다. 승객의 꽁무니를 따라가던 내 동공이 재형의 동공과 마주쳤다. 나는 그때까지도 승객이 재형과 동석인줄 모르고 있었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통화를 이어갔다. 상스러운 욕설을 여자의 달링은 모두 청감했으리라. 허나, 기적처럼 일어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사랑에 빠진다는 폭발적인 환상엔, 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장벽도 무화시켜버릴 악마적 힘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자 또한 전염병 중에서도 최악의 전염병인 사랑의 전염병에 감염되어 있었다.  
   *
  재형이 호주에 도착한 날, 첫 마디가 호주의 의적 ‘네드 켈리’를 조사하러 간다면서 안내를 부탁했다. 나는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뉴캐슬 도매스틱 공항의 커피숍에 앉아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시드니의 달링허스트 감옥을 안내 해 줄게.” 그가 학보사 기자시절 더러더러 시를 학보에 발표했던 일과 시인 헨리 로슨이 한 때 수감되었던 감옥을 머릿속에서 합성하며 설득했다. “감옥의 아트, 감옥의 아트란 테마도 좋지!” 나는 재형이 혼자 멜븐에 가서 네드 켈리의 ‘아이론 헬멧’을 관람하고, 희대의 예술이라고 감탄하는 표정을 상상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나는 재형과 동행하고 싶지 않았다. 나란히 비행기에 탑승해야 하고 같은 호텔에 묵어야 하는 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1942년 일본 잠수함이 이 도시를 침공했거든. 당시의 기록을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는 3D 다큐멘터리 프로젝트팀에 합류한 사정이라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자연스럽게 둘의 대화는 일본으로 점화되었다. 천황을 향한 일본인의 광기어린 충성심과 일본이 잠수함으로 호주를 침공했던 불굴의 일본 정신에 대해서…… 둘은 제법 거창한 담론을 벌였다. 그럼 그들의 미친 정신에 희생당한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생목숨과 영혼은? 하다 보니 논쟁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까지 이어졌다. 재형과 제법 거친 설전을 벌여보았지만 결론이랄 것도 없이 대화가 중단되고 말았다.  
  재형이 내 사정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나는 물고 있던 숨을 토했다. 지난한 기억의 노예에 불과한, 옛날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 같은 성적 긴장감 없는 남자에게 수형되어, 형벌노역을 하고 싶지 않거든, 하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전에 그토록 매력적이던 재형이 지금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감정이 맞고 그때의 감정이 틀렸거나, 그때의 감정이 맞고 지금이 틀렸거나…….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그를 만나면서 깨닫게 된 감정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잠들어 있는 재형의 옷을 한 번 훑어본다. 아내가 있는 남자의 옷은 어딘지 모르게 섬유의 결이 안정되어 보인다.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뒤로 밀어서 사라져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란 이름을 가진 꽃잎들이 부르르 진저리를 치고 있다. 바람이 분다. 이렇게, 이렇게 몸으로 보여줄 수는 있어, 하지만 사랑을 설명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세 가지 색의 꽃잎이 동시에 몸을 흔든다.  
  기차가 네 번째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나는 몇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해보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안과 백인 또 아프리카인까지. 나는 곧 그들이 나의 외로움을 막기 위한 방패역할임을 알아채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내 양심을 알고 있을 바에야, 누구도 나를 위해 희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었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번번이 상대를 향한 내 배반의 점괘가 먼저 떨어졌다. 문득 나는 징그럽게 인간적으로 변해버렸다.   
   *
  오늘 아침, 마치 누군가 음향기기의 스위치를 꺼버린 것 같았다. 끈질기게 이어지던 여자의 통화음이 멎은 것이었다. 드디어 객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승객들의 표정을 바삐 훑었다. 더러는 표정을 노출하고 더러는 음흉하게 표정관리를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몇 분 후, 여자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여자의 눈에서 검은 마스카라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흘렀다. 여자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산호조개껍질 같은 그녀의 귓바퀴에서 물고기 모양의 귀걸이가 잘랑거렸다. 나는 여자가 살아 있는 물고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시 객실의 정적이 깨져버렸고, 여자의 울음이 그녀의 감정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되어 온 객실에 흘러넘쳤다.  
  한 동안 울던 여자가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여자는 플랩백에서 화장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삼인용 좌석 위에 화장품 용기와 도구들을 가지런히 줄지어 늘어놓고 콤팩트의 뚜껑을 열었다. 나는 화장하는 여자를 응시했다. 순간 묘한 수치심이 내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왜 자꾸만 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정말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 부끄러웠다. 물론 내가 살아가면서 그와 비슷한 감정에 빠져보았던 일은 그 일 외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지만. 
  마스카라가 번진 여자의 눈은 검은 우물 같았다. 남자들의 눈에 여자가 아름답게 보일까, 나는 자신 할 수 없었다. 파란 눈, 목소리, 옷차림, 긴 머리와 짧은 치마 그리고 짙은 화장은 삼십대로 보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나는 사십대란 숫자에 내기를 걸었다. 아무리 잘 가꾸어도 피부의 탄력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는 내 탐구심을 신뢰했다. 
  여자가 콤팩트를 천장과 수평으로 쳐들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의 티슈를 꺼내 눈가의 검은 마스카라를 세 번에 나누어 닦아냈다. 다시 말아 올린 여자의 속눈썹이 송충이처럼 생동감 있게 살아났다. 분을 토닥이고, 삼각형 구도로 볼터치를 살리고, 가는 붓으로 입술의 선을 긋고 그 위에 립스틱을 바른 후, 아래위로 쫀득하게 빨아먹었다. 그리고 골고루 향수를 뿌린 후 긴 금발 머리를 수십 번 빗질했다. 포도주색 매니큐어가 발린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어가며 여자는 계속 화장에 공을 들였다. 

테리사 리 소설가 
15회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
11회 민초문학상 수상
소설집 <비단뱀 쿠니야의 비밀> <어제 오늘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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