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1년 반이 되어가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몰라 우리 사회를 지치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갑갑하다!”와 “불안하다”라는 푸념 섞인 넋두리다. 

독자 여러분은 어떠신 가요? 괜찮으세요? 좀 버틸 만하세요? 그럼 천만에 다행입니다만, 사라질 듯, 잠잠할 듯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또 여러 변종을 일으키며 괜찮아가던 사회를 다시 들쑤셔 놓았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조용한 이곳 호주에서도 ‘록다운 상황’을 풀어 달라고 시위를 하고, 어떤 나라는 포기를 했는지 아예 “우리는 코로나와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하면서 걱정스런 호기를 부리는 나라까지 생겨 시민들의 마음이 온통 뒤숭숭하기 이를 데가 없다. 

여기는 정부의 록 다운 규정을 어기는 사람에게는 거의 ‘천 만원’가량의 벌금을 부가하니, 없는 형편에 그게 무서워서 정말 어딜 가보려 해도 엄두도 못내고 국제적 민주투사모양으로 원치 않는 ‘가택연금’을 하며, 원치 않는 ‘도’를 닦으며 수양(?)을 하고 있으니.. 

이런 시절에 나누고 싶은 인상 깊은 고사 두 개와 성경의 인물 두 사람이 겹쳐 떠 올라서 펜을 들었다. 요즘이야 인터넷만 잘 두드리면 이런 고사성어에 얽힌 유래를 잘 알 수 있어서 길게 설명하진 않겠다.

#첫 번째 이야기: 옛날 중국의 춘추 시대에 진나라의 왕이 조나라의 무령왕을 초대하여 회담을 청했다. 의심스러운 면이 있었으나, 피하면 더 비겁한 왕이 될 것 같아 왕은 재상 중 한 사람인 ‘인상여’를 대동하고 회담에 임했다. 진나라의 신하들이 호기를 부리며 “우리 진나라 왕의 체면도 있고 하니 조나라의 읍성 15개를 양도하면 어떻겠소?” 하자, 무령왕이 당황했다. 이 때 ‘인상여’ 재상이 나서며, 진나라 왕에게 되물었다. “그건 별 문제될 일이 아니요, 근데 우리 조나라 왕의 체면도 있고 하니 진나라의 수도를 내어 주면 어떻겠소?”하고 맞받아 치고, 회담은 결렬되고, 돌아온 무령왕이 ‘인상여’를 재상중에서도 높은 ‘상경’에 임명하여 치하했다. 

조나라에는 온갖 전장을 누비며 상경에 오른 ‘염파’라는 대장군이 있었는데, 그이가 시기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인상여를 헐뜯어 댔다. ‘나는 피흘리며 전쟁터를 누빈 공으로 상경이 되었는데, 저 인상여는 세치 혓바닥 잘 놀려 상경이 되었으니 어찌 상경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며 공사석간에 놀려 댔고, 이를 눈치챈 ‘인상여’는 그와의 충돌을 피해 다녔다. 이를 본 인상여의 부하들이 볼멘 소리를 하며 불평했다. “대감은 어찌하여 저 염파 장군의 공격을 피해만 다니십니까?” 그때, 인상여가 이런 말을 한다. “진나라가 우리를 쉽게 침공을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 대장군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인데, 만약 우리 둘이 서로 으르렁거리면 적군인 진나라에게 얼마나 좋은 빌미가 되겠느냐, 나는 진나라의 왕에게도 큰 소리쳤던 사람이라 염파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지만, 나라가 먼저고 개인적인 감정은 나중의 일이 아닌가?”라고 했다. 이런 인상여의 깊은 심중을 전해들은 ‘염파’는 대장군답게 인상여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화해를 했고, 이 후로 두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배신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는데, 여기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목 벨 刎(문)’, ‘목 頸(경)’, ‘갈 之(지), ’교제 交(교)’, 즉 ‘문경지교(刎頸之交)’이다.  


혼란한 시대라, 믿을 사람이 없는 시대라 한다. 이렇게 속 깊은 사람 만나 문경지교의 기쁨을 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다 한 여인의 고백이 떠 올랐다. “시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시어머니께서 어디를 가든지 나도 동행하겠으며, 죽기까지 시어머님을 따르겠습니다!”하며 시어머니 ‘나오미’를 모셨던 이방 모압 출신의 이민자 여성 ‘룻’이 생각났다. 그런 충절이 그리운 시절이다. 하나님은 그런 여인을 다윗의 증조 할머니가 되게 하셨다. 참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다!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춘주전국시대의 말엽이다. 진나라의 공격으로 위협을 느낀 조나라의 혜문왕이 아우인 ‘평원대군’에게 인재들을 모아서 ‘초’나라로 가서 지원군을 요청하도록 했다. 평소에 평원군은 자기 집을 열어 전국의 인재들을 식객으로 거두고 있었다. 문무겸비한 사절단을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식객 중의 한 사람인 ‘모수’라는 사람이 평원군에게 부탁을 한다. “대감, 이번 사절단 길에 저를 한번 데려가 써 주십시요”, “자네는 누구신가?”, “저는 대감의 식객으로 있는 모수라는 사람이올씨다”, “그래, 우리 집에 머문 지는 얼마나 되었소?”, “예, 한 3 년되었나 봅니다”, “그래요, 그럼 별 일없으니 그냥 일이나 보시오”하고 돌아서는 평원군에게 ‘모수’ 다시 강청을 한다. “대감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대감이 저를 한 번도 주머니속에 넣어주지를 않았지 않습니까? 이번에 저를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신다면, 뾰쪽한 송곳 끝이 아니라 손잡이까지 나오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하여, 모수는 발탁이 되었고, 평원군은 초나라로 가서 모수의 활약으로 필요한 지원군을 얻어 나라를 구하게 되었답니다. 

여기서 평원군이 모수의 청을 물리치면서 한 말이 있는데, “夫賢士之處世也(부현사지처세야), 譬若錐之處囊中(비유추지낭중), 其末立見(기말립견)” 풀어서 설명하면, “현명한 선비가 세상에 산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반드시 드러나 보이는 법이오.”라는 뜻입니다. 
근데 당신은 3년이나 우리 집에 있었는데, 내가 인지하지 못했으니, 당신 실력이야 보나 마나겠지요…. 하는 말입니다. 아무렴, 그렇지 않겠습니까!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데, 그 끝이 어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이래서 나온 이야기가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문자이지요. 인재는 파묻혀 있어도 반드시 그 진가가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이랍니다.

답답한 ‘록다운’ 시절이라, 내 청춘 다 날아 가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조바심에 너무 불안해하지 마시라는 위로입니다. 주머니속의 송곳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밤하늘의 별과 같고! 정오의 태양같은 존재들 아니던가요?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렇게 귀히 여기시는데 무에이 그리 안달 낼 일이 있답디까? 옛날, 망해가는 조국에서 쫓겨나 바벨론에 정착한 다니엘이란 젊은 아이가 있었지요. 그래도 거기서 열심히 살아 바벨론이란 이방 나라의 재상까지 성공해서 올랐는데, 그의 인생 말년에 그 바벨론마져도 신흥제국 페르샤에 망해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구제받을 길이 없는 망한 제국의 재상으로 척결대상 1, 2호쯤 되는 신세가 되어버린, 지지리도 운 없는 사람 다니엘 말입니다. 그래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새 제국에서도 중용되기는 했는데, 소위 개국공신들에게 질시를 받아 사자굴에 던져졌던 비운의 주인공 다니엘이 기억나세요? 그가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생명이 위태롭고, 평생 쌓아온 모든 것이 일순간에 재가 될 수 있다는 그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도”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일장춘몽 같다는 길지 아니한 인생길 가는동안 다니엘처럼 지킬 것을 지키며, 낭중지추를 잊지 않는 그런 삶이면 코로나도 한 번 붙어 볼만 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가호가 있기를..   

김호남목사(PhD, USyd)
시드니신학대학 한국신학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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