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을 여기에서 논한다면  먼 나라 이야기가 될까? 아니다. 적어도 여기 1세와 1.5세 한인들이 이용하는 매체는 호주가 아니라 대부분 고국의 제품이다. 왜 그런가는 짐작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의 매체 이용 패턴도 그렇다. 인터넷으로 고국에서 날라와 현장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주는  텔레비전, 유튜브, 카톡 화면과 그 콘텐츠가 압도적이다. 그 외는 역시 인터넷 화면에 뜨는 한국의 신문과 간행물 말고는 거기에서 실려 오는 종이 책을 읽는 것이다. 현지에 발행되는 교민 신문과 간행물인데 우리말이니 넓게는 한국 언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게 교민의 의식구조와 행태에 크게 영향을 미칠 건 분명하다. 모두 좋은 조사, 연구 감이지만 그런 건 한인사회에서 말도 꺼낼 수 없을 만큼 관심 밖이다. 왜 글 머리가 이런가? 

한국의 언론 환경에 대하여 조금 쓰려는데 강 건너 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한 가지 불행한 것은 고국과 해외 한인사회 간의 뉴스의 흐름은 ‘일방향형(One way)’이어서 고국을 향하여 무슨 말을 한들 허공에 뜨고 만다. 
지금 한국에서는 여당이 발의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격돌하고, 언론사, 언론 단체, 한국언론학회가 언론 탄압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히는 등 난리 법석이다. 한국은 지난 몇 십년 동안 언론을 규제했다가 완화했다가를  여러 번 반복했었다. 그러니 데자 뷔(Déjà vu!)다. 이 개정안은 조만간 국회의 본회의에 상정될 것이지만, 통과가 되든 아니든 이 글의 입장은 그대로다. 

언론의 핵심 이슈를 논할 때 먼저 써야할 키워드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자유의 두 가지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규제, 어느 쪽이든 그  목적은 전자에 있다. 어느게 더 중요할까? 한국을 떠나오기 전 언론의 현장에 있었고, 나와서도 지켜봐온 나의 결론은 이렇다. 언론의 사회적 책임은 언론 자체가 알아서 잘 해야지 밖에서 누른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그게 언론의 본질이다. 

밤의 대통령
지금의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거나 망각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언론 사주나 언론인이 이론과 제작 기술 면에서 미흡해서가 아니다. 대개는 기업으로 봐서는 이윤, 종사자로 봐서는 이권 챙기기라는 도덕성에 있는게 보통이다. 힘을 발휘해보려는 인간의 본능도 있다. 일종의 권력이다. 언론은 글을 잘 또는 나쁘게 써줌으로써, 폭로의 경우는 침묵을 지켜줌으로써 상대에게 이익, 불이익을 안겨줄 수 있다. 상대가 정권인 경우는 그 위력이 엄청나게 크다. 언론 사주를 한때 ‘밥의 대통령’, 기자를 ‘무관의 제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그런 잠재력을 가진 언론이 사회적 책임을 버리고 딴 짓을 할 가능성과 방법은 마음만 먹으면 눈에 보이지 않게 무진무궁하다. 법으로 규제한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자들의 수준이 이번 개정안의 초점이 가짜 뉴스의 양산의 징벌에 있다고 하지만 언론은 더 나쁜   대안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언론은 법조와 관료 못지 않게 머리 좋은 엘리트 집단이다.
박정희 정권 18년동안 언론에 대한 정부의 직간접 통제는 최고조로 달했었다. 그때 언론인의 촌지와 이권 개입 또한 최고였다. 똑똑한 언론인은 정부에 비판적이기 보다 오히려 협조해 촌지와 이권을 챙기는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아래 각각 세무조사와 기자실 폐쇄 등을 수단으로 한 이른바 언론개혁 조치치고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게 잘 되었으면 지금 왜 새로 언론 길들이기가 필요할까.

가짜 뉴스
내가 한국을 떠나올 무렵, 김성진씨가 공보부 장관을 할 때 신문과 간행물출판은 정부 허가제였다. 한 가지 언론 규제다. 얼마 있다가 등록제로 바뀌었는데 어디 이 자유화 조치가 언론으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을 더 성실히 수행하게 만들었는가?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난  매체들간 극심한 광고 경쟁 속에서 불공정 보도와 언론의 비리는  더 늘어났다.  
박정권 시절에 텔레비전은 지상파 셋이 전부였다. 당시 경제부총리도 지내고 한국일보 사주였던 장기영씨가 컬러 텔레비전을 하고 싶어했으나 박정희씨가 허가 해주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아래 지상파와 맞먹는 종편채널을 대폭 허가하여 텔레비전 방송국이 갑자기 늘어났다. 그 결과 이 매체산업은 외형은 몰라도 수준은 못해졌다. 
치열해진 시청률과 광고 경쟁은 이 매체의 콘텐츠는 좋게 말해서 대중문화화, 나쁘게 말해 저속화로 치닫게 만들었다. 시드니에서 텔레비전을 틀어보면 안다. 어떤 시간대든 광고가 압도적으로 많다.    광고료도 이전보다 내려가 광고를 더 받아도 성이 안차 그런 것 아닌가.

제 4권부
앞에서 언론이 이권을 챙기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그 하나는 매우 한국적이고 후진적이나 일반 한국인이 그게 왜 나쁜지 잘 모른다. 정권이 불러 주면 머리 아픈 언론 그만 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갈아타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드문 그런 사례가 한국에서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더 그럴 것 같다.
문제는 누가 이른바 제 4권부(The Fourth Estate)를 지킬 것인가이다. 김빠진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하고 독재국가에서처럼 장식(裝飾)품이나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언론 규제에 앞서는 정치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다. 특히 언론을 버리고 떠나온 이른바 언론계 출신 국회의원이  여기에 선봉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볼 때 그렇다.  
마지막으로 언론에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한다면 잘 될까? 아니다. 그것도 지금의 정치사회문화 풍토에서는 어림도 없다. 대부분 선진국에서처럼 한국에도 언론의 횡포를 막는 명예훼손금지법이 잘 되어 있으니 그걸 활용하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정치사회문화에 있다. 언론도 사회의  일부이므로 언론만 나무랄 것이 아니디.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분석이 먼저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그 많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한다는 언론학 교수, 양심있는 전직 언론인 출신, 이해 관계가 없는 독립적인 여러 다른 정치사회 관련 분야 학자와 지식인들이 팀을 이뤄 공동으로 하는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이며  심층적인 연구로 길을 밝힐 것을 제안한다. 이 다학문적 접근에는 사회심리학(Social psychology) 전문가들이 끼어야 한다. 선진국이라는 한국이 계속 혼란을 겪고 사회통합이 어려운 것은 구성원 간 존재하는 큰 심리적 거리감(Social distancing, 이는 코로나 방역을 위한 물리적 distancing이 아니다) 때문이기에  그렇다.

당장 해법은 못되어도 옳은 방향은 나올 수 있다. 쉬운 일이  아니나 그 길 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정권마다 다른 임시 땜방질인 입법이나 행정 조치로는 나라 돈만 축내고 소용없다. 그런 돈 아껴 이미 기술한 장기적이고 범국민적 대안마련에 쓰기를 건의한다.
350개도 넘는 한국의 대학은 대부분 언론 관련 학과를 두고 있다. 대부분 한국의 언론 종사자는 그 학과 출신이 아니며 거기와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언론 이론의 모체인 그 방대한  학계가 이런 큰 현실 사회문제를 보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교수들은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학술 논문 발표 말고는 신문 칼럼을 쓰거나 방송 시사토론에 나와 얼굴을 알리는 데 열을 올리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가 시끄러워지면 면피용으로 시국 성명이나 발표한다. 그런 식으로는 교수들의 또 다른 역할인 사회참여(Community contribution)를 제대로 할 수 없다.  

김삼오(커뮤니케이션학박사,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skim193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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