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쿠온이 초등학교 5학년 때 큰 학교로 전학을 했다. 시드니 하버 브릿지 건너 동쪽 지역에 있는 학교였다. 집에서 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거리다. 등교 첫날이었다. 집근처에 학교로 가는 스쿨버스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류장이 어딘지 몰랐다. 그러나 버스를 놓치면 출근길 교통체증 속에서 쿠온을 차로 학교까지 태워줘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집에서 조금 늦게 나온 우리 가족은 스쿨버스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류장을 찾아 뛰었다. 느긋한 호주인 남편과 쿠온은 앞장 서 뛰는 내 뒤로 엉거주춤 따라 오고 있었다. 뛰면서도 진작 알아둘걸, 십분만 일찍 나올걸 하는 후회가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규정에 엄격한 호주 버스가 시간 맞춰 도착하고 출발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버스가 어디서 서는 줄도 모르고 달리는 데 멀리서 스쿨버스가 보였다. 남편은 이미 늦었으니 포기하자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달리기대회에서 일등 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속력이 났다. 버스를 따라잡은 나는 버스 옆을 마구 두드렸다. 놀랍게도 도로 한가운데서 버스가 섰다. 운전기사에게 오늘 처음 학교 가는 날이니 좀 태워달라고 사정했다. 운전기사는 오늘은 태워주겠지만 버스 정류장은 다음 신호등 300미터 앞쪽이니 다음부터 꼭 그리로 가야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좌석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목을 내밀었다. 뛰느라 상기된 쿠온의 얼굴은 버스에 올라타며 더욱 빨개졌다. 남편은 우리를 모른 체하며 고개를 숙이고 멀어져갔다. 

   그날 학교에 갔다 온 쿠온은 버스 세운 한국인 엄마 덕분에 첫날부터 유명해졌다고 했다. “역시 한국 아줌마는 대단해”라며 쿠온과 남편은 입을 모았다. 한국에 몇 번 다녀온 후로 그들 나름대로 한국 아줌마가 어떤 인류인지 정의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새로운 친구가 생길 때마다 스쿨버스 이야기를 하며 한국 아줌마에 대한 설명도 덧붙인다. 돌이켜보면 그때 스쿨버스를 놓쳐도 여유있게 차로 바래다줄 수 있었다. 그러나 황급한 순간에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이 버스를 꼭 타야한다는 간절함에 눈이 먼 것이다. 쿠온이 말하는 아줌마의 조건 첫 번째는 눈앞의 것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내가 한국 아줌마일까? 맞다, 나는 두드려야 문이 열린다는 것을 아는 한국 아줌마이다. 

   한국 아줌마는 타고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인생의 반을 살고 있는 호주에서 지금 나는 한국 아줌마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십년이 넘는 시간동안 호주인과 한국인 혼혈아로 호주에서 태어난 아들 쿠온을 키우고 호주 사회에 잘 적응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한다. 쿠온이 호주 사회에 살면서 불이익을 겪지 않을까하는 조바심도 있었다. 어릴 때는 서로 다르다는 구별 없이 놀지만 철이 들면 주위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쿠온이 자라면서 백인 친구들과 섞이고 또 엄마가 다른 인종이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국적이 다른 남편과 결혼하면서 2세의 미래에 대한 염려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내 자식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차별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그런 상황에 있을 때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다. 다행이도 걱정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쿠온은 놀이터에서 친구들을 리드하고 다른 학부모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다르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쿠온은 한국인도 호주인도 아닌 독립국가 쿠온이었다. 내가 처음 호주에 도착했던 이십여 년 전보다 호주 사회는 빠르게 다민족 국가로 변했다. 특히 디지털 원주민인 쿠온이 속한 Z세대는 윗세대에 비해 인종의 다양성을 더 수용하는 편이며 남녀 성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가장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온라인에서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세계의 젊은이들은 평등하다.  

   친구들보다 두 뼘은 더 큰 키를 타고난 덕분에 쿠온은 어릴 때부터 중심에 서있었다. 따돌림을 받지 않을까 하는 내 불안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별 문제 없이 잘 자랐던 쿠온이었지만 단 한번 뜻밖의 말을 해 내 가슴이 서늘해 진적이 있다. 자신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호주 친구들 속에서 당연히 자신을 호주인으로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쿠온이 동서양 혼혈이나 서양인보다 동양인에 자신의 정체성을 둔다는 점에 놀랐다. 동양인은 서양인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생각에도 충격을 받았다. 낙천적인 그에게도 혼혈아라는 자의식이 어깨를 두드렸던 것이다. 그의 사춘기 어느 하루의 증상이었다. 

   “너는 얼굴 잘생겼지, 키도 크지, 엄마 닮아 피부도 미끈하지, 게다가 시어머니 자리까지 훌륭한데 무슨 걱정이니?”
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내가 잘 생겼다는 말을 할 때마다 쿠온은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다. 

   “한국 아줌마는 모두 자기 자식이 최고라는 착각을 하고 있어. 자신과 자기 가족을 제대로 파악하는 눈이 필요해”  

   한국 엄마들은 자기감정에 정직하다는 나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한국 아줌마에 대한 쿠온의 편견은 지금도 변함없다. 쿠온이 말하는 한국 아줌마의 조건 두 번째는 자기 자식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자기 여자 친구를 소개해도 시큰둥하다고 불평한다. 어떤 잘난 여자 친구를 데려와도 자기 아들에게는 못 미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럼 내가 6개월에 한 번씩 바뀌는 아들의 여자 친구를 볼 때마다 나팔을 불고 춤이라도 춰야하나. 그리고 내 아들이 최고지, 뒷집 아들이 최고인가. 역시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쿠온의 조건에 부합되는 한국 아줌마가 분명하다. 

   쿠온이 나를 한국 아줌마라고 선언하는 세 번째 이유는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동양인으로서의 선입견을 아직도 깨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내가 서양사회에 살면서 깨진 선입견이 몇 가지 있다. 한국에서 교육받고 사회생활을 하며 가졌던 선입견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일 것 같던 서양사회가 가진 뜻밖의 보수적인 면이다. 규칙이 엄격한 쿠온의 학교에서는 교복도 단정해야하고 머리도 교복칼라에 닿으면 안 된다. 선생님께도 항상 존칭을 써야한다. 자유를 존중하지만 방임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또 진취적이고 외향적인 서양 학부모들이 학교의 방침과 부딪치면 반드시 뒤로 물러선다. 부당하다고 교무실에 와서 따지는 부모는 없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제일 나서는 학부모가 나였다. 

   서양인들이 이기적일 것이라는 편견도 있었다. 호주 백인들이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선입견도 있었다. 동양인들끼리 모여 있으면 호주 백인들은 말 걸기를 주저한다. 처음에는 우리를 꺼려한다는 착각을 했다. 알고 보니 먼저 말을 걸어주면 그들은 굉장히 기뻐한다. 우리를 배려해서 조심하는 것이다. 개인적이라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예의 다음에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쿠온의 여자 친구들은 나와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 같은 호주 백인이라서인지 남편과는 대화를 잘 풀어가지만 나에게 먼저 말을 잘 걸지 않는다. 처음에는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괘씸했지만 쿠온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엄마가 너무 무서워서라고 한다. 동양인과 대화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모르기 때문에 어렵게 생각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월드는 먼 세계인 듯하다. 

   내가 가졌던 서양사회의 또 다른 편견은 서양아이들이 이성 친구를 일찍 사귀고 성관계가 문란하다는 것이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호주의 남학교에서는 운동을 많이 시킨다. 사춘기의 넘치는 호르몬을 땀으로 빼고 우울증도 해소시키기 위한 것이다. 운동을 좋아하는 쿠온은 학교 스포츠로 힘을 다 쓰기 때문인지 귀가하면 많이 먹고 일찍 잠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쿠온의 친구들도 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여자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쿠온의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나는 여자 친구 있냐고 묻는다. 그들의 이성 관계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몸 밖으로 튀어나온다. 진짜 궁금하다. 그럴 때마다 쿠온은 나를 친구들 주변에서 몰아내며 한국 아줌마처럼 굴지 말라고 한다. 여자 친구가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왜 한국을 들춰내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 아줌마와 아들 친구의 여자 친구간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단순히 한국 아줌마는 남의 사생활에 호기심이 많다는 것인가. 한국 아줌마는 아들의 친구에 관심이 많다는 것인가. 쿠온이 한국적인 것(Korean thing!)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데, 한국적인 것을 얼마나 잘 알고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다음 주 하편 연재) 

 

[수상 소감]
 
이상한 시간을 견디고 있어도 봄은 온다. 5킬로 반경만 다닐 수 있게 발이 묶여버린 시드니의 코비드 봉쇄에도 봄은 뚫고 온다.
 
8월, 봄이 열리는 모습을 본다. 시드니에 이십년 넘게 살면서 이제야 제대로 꽃들의 잔치를 구경한다. 목련이 난리법석을 떨고 철쭉이 몰려오고 재스민이 춤을 춘다. 내가 멈추니 더 잘 보이는 것인가, 세상이 멈추니 꽃들이 몰려오는 것인가. 집 주위를 산책하고 정원에 앉는다. 무릎을 꿇고 내 정원을 들여다본다. 오래 보고 자주 보니 꽃 너머로 벌레 먹은 나뭇잎들이 눈에 띈다. 가지와 줄기에도 오랜 상처가 보인다. 꽃은 꽃만이 아니었다. 나무는 이렇게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웃는 꽃들을 터뜨렸던가. 

그동안 나는 꽃만 보고 탄성을 내뱉고 바삐 지나갔다. 흉터가 생긴 나무들을 보지 못했다. 병든 나무를 얼싸안아본다. 아픈 건 나무인데 내가 나무에게 위안을 받는다. 서로를 안고 있으면 꽃은 계속 필 것이고 멈춘 시간도 다시 흐를 것이다. 그 날이 오면 나의 정원에 초대할 어여쁜 그대들을 생각한다. 동백꽃 머금은 붉은 립스틱을 입술 가득 두껍게 칠할 그날을 기다린다. 

박지반(Jivan Khelli) 작가 소개
경주 출생, 95년 호주 이주. 
소설 ‘자전거를 타고 온 연인’ 출간, 
에세이집 ‘미안해 쿠온, 엄마 아빠는 히피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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