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새해가 시작되고 9일 동안의 회개 기간이 지나면, 10일 째가 되는 날 25 시간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심지어 물도 마시지 않는 완전 금식에 들어간다. 기도로 새해를 맞이 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하나님은 금식까지 해가며 새해를 맞이하게 하셨을까? 

토라

며칠 전 친구 랍비의 회당에서 줌으로 연결한 미팅에서, 회중들에게 금식을 위해 미리 물을 많이 마셔 두라고 권고하면서도, 어렵고 힘든 내색을 하기보다는 다분히 특별한 예식에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날은 평소 회당에 잘 오지 않는 세속적 유대인들을 포함해, 전 세계의 유대인 커뮤니티가 일년을 통틀어 회당에 가장 많이 모이는 날이라고 한다. 온 국민이 금식하며 새해를 시작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는 것이 한편 신기하기도 하다.  
 
1. 변하지 않는 인간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듣고, 말한다. 이 말은 긍정적인 의미 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더 크다. 그래서, ‘사람은 잘 변하지 않으니 쉽게 믿거나 방심하면 안된다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죄성과 욕망으로 점철된 타락으로부터 벗어나고자했던 종교적 갈망은 중세에, 여러 금욕주의적인 참회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나중에 유대교의 하시디즘에서는 . 하나님이 진정 원하는 것은 기쁨의 예배와 삶인 것에 반해, 이러한 것들이 다분히 우울증과 자기비하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했다. 신이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과 달리 인간은 자학하면서 변화를 추구 했지만 그것이 빚어낸 결과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방의 축복의 계명

그런 면에서 랍비 제러 레비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몸을 상하게 하는 외형적인 가해가 핵심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 더럽고 악한 것이면, 이 곳도 쓸고 저 곳을 쓸어도 더러운 곳이 남게 마련이므로, 단순하게 악한 것으로부터 떠나고, 그저 선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악을 상대해서 이기고자 애쓰는 것은 소용없고, 그곳에 젖어 있는 생각과 환경을  피하고 완전히 동 떨어진 다른 편에 있는, 선한 생각과 환경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 하는 것이다. 신이 진정 원하는 올바른 절제는, 억압과 헐벗음으로부터 죄인을 자유케하려는 정의로 연결돼야 한다고 바로 잡는 것이다.      

대속죄일의 회당

2. 금식의 이유

대속죄일이 되기 전 날에, 죄수에게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 식사를 하게 하 듯, 유대인들은 대속죄일 전날인 에레브 욤기프르(Erev Yom Kippur)에, 죽음을 맞이 한다는 의미의 마지막 식사를 갖는다. 그리고 이 때, 강렬하게 다가온 절박한 죽음을 앞에,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듯, 마지막으로 죄의 고백의 기도를 올리게 되는데, 이는 마지막 음식을 먹다가 미처 속죄일을 맞이 하지 못해 용서를 받지 못하고 죽을 수 있는 것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만큼 죄의 고백과 신의 용서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모든 음식과 물을 차단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방어와 핑계를 죽음으로 내 던지고 오직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신의 용서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결코 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속죄는 개인의 노력이나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은혜에 의한 것을 의미하고, 또한 금식은 결국, 하나님의 큰 은혜에 대한 자기 권리 포기의 한 표현인 셈이다. 그러므로 금식은 금욕적이거나 율법적인 강제성이 담긴 힘든 노역이기 보다, 속죄를 선물로 받는 왕 앞에 나가기 위한 자발적인 예복 점검과 같은 것이다. 신이 나서 선뜻 참여할 득템의 약속인 셈이다. 

회개하지 않은 아간의 최후

3. 언약적 관계 속으로

미쉬나 토라의 저자이며 12세기 최고의 현자라고 불리는 마이모니데스는, 참회는 사람을 변화케 한다고 가르쳤다. 후회를 통해 과거로부터, 현실에서 죄의 거부를, 그리고 미래를 향하는 참회의 과정을 통하면 죄와 흠이 많은 사람도 변할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대 죄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로 참여하게 하는 날이라고 설명한다. 대속죄일은 은혜와 속죄의 성례적인 능력이 백성들에게 흘러나오게 하고, 죄로부터 용서의 신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다시금 신의 경지에 이르는 파트너로 완성되는 날이라고 격려한다. 

큰 물고기가 뱉어 낸 요나

유대인들은 이 날에 요나서를 읽는다. 원수의 나라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싫어한 선지자가 도망다니다 결국 그 백성에게 회개를 외치고 축복이 임하는 것을 그린 책이다. 유대인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자신들이 이방인들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은 죄를 회개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언약이 없는 이방인인데도, 그들을 회개케 하시고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 임하기를 원하는 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는 꼴통 짓을 하며 도망다니고 대들고 불평했지만, 결국 사람에게 원수로 보여도, 하나님은 손 때가 뭍은 니느웨 백성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죄와 상관없이 회개만 한다면 축복이 임하게 하려는 신의 분명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때, 자신들의 용서를 감사하며, 이웃을 위한 자선을 결단한다. 이웃과 이방인들을 위해 자발적인 감사로 표출되는 것이다.  

로쉬하샤나와 욤키프르는 새해를 시작하는 유대인의 세계관을 토라로 부터 발견하는 출발점이다. 하나님과 하나되는 영적 회복의 시간이며, 불편한 이웃과 화해하는 시간이며, 이웃을 사랑하고자 다짐하는 시간이다. 팬데믹으로 인한 제약과 불확실의 시기에도, 하나님의 토라는 여전히 풍성한 열매와 밝은 미래에 대한 축복의 새 출발을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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