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록다운이 완화 되면서 원상으로 회복되는 반가운 소리들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눈에 띄는 첫 번째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미장원이나 이발소 앞에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줄지어 서있는 것이다. 이제, 지난 삼개월여 자란 머리도 다듬고 식당에도 가고 바다도 볼수 있고 낚시도 가도, 등산도 갈 수 있게 되었다. 억압된 생활로부터 얻는 일상의 자유에 대한 기쁨이 이처럼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모두 다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창한(?) 인류애적인 동질감도 솟아 오른다.  새삼 세상에 좋은 것이 많이 있다는 기대치 않은 설득력에 순전한 수긍이 실감 된다.  

인간의 욕망과 바벨탑

창조와 에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을 때의 원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자유로우며 부족함이 전혀 없는 좋은 곳 이었음을 하나님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6일 동안 창조를 마친 신은 ‘보기에 좋았더라’ 라는 표현을 하며 토라는 ‘토브-좋다’라는 히브리 단어를 여러 번 반복 하여 기록하고 있다.  에덴은 먹을 것과 쉴 곳과 모든 피조물과 평화를 이루며 심지어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더 할 나위 없는 선으로 가득한 안식의 장소 였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끝까지 유지되지 못하고, 아담과 하와는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나고, 유리하던 극도로 타락한 인간은 또 한번 노아의 때에 세상을 다시 한번 깨끗게 하는 홍수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맞이 하게 된다. 지금처럼 방주 속의 긴 록다운이 지나고 새로운 창조과 다를 바 없는 새 세상을 맞이 했지만 다시금, 좋은 세상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하고 또 한 번, 한 사건으로 파국의 전환점을 맞이 하게 된다. 그것이 오늘 다루는 바벨탑 사건이다.     

반복되는 바벨의 역사

 바벨탑 사건

탈무드의 현자들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의 이야기는 고작 9절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담고 있는 문자적, 철학적 의미와 반전은 대단하다고 평가한다. 랍비들은 창조의 이야기를 비롯한 노아의 홍수는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것이기 보다 여러번 반복적으로 말하는 ‘좋다’라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세상을 향해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세상에 배어있다는 말이다. 곧 세상을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과 선한 세상의 질서를 위해 기초적 경계를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이 땅과 하늘을 분리한 것이라고 그들은 가르친다. 하늘과 땅을 나누는 분리를 통해 인간이 인간이며 신은 신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나타낸 신의 의도와는 달리 인간은 스핑크스나 피라미드, 인간이 신의 모습을 하거나 신이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는 흉내를 역사 가운데 심심찮게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창조-미켈란 젤로

그리고 탈무드는 율법을 통해서, 우유(삶)와 고기(죽음)를 따로 먹고, 모직(wool)과 면(linen)을 구분하고, 땅에 씨를 뿌릴 때 여러 종자를 섞어서 뿌리지 말아야 할 것을 주지하고, 분리를 통해 세워지는 세상의 질서와 인생의 축복을 강조한다. 시편(115:16)에서도 “(시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하고 속해진 영역이 다름을 표시하고 있다. 이것은 존재론적인 근본으로 작용하고 있다.  
토라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의 확연한 선을 긋고 있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인간은 하늘에 닿아 보겠다는 야심적인 포부를 “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세기 11:3-4)” 라고 토라에 기록하고 있다. 

에덴과 인간, 천사의 책망

인간의 욕망

바벨탑을 세우려는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의 경계를 함부로 넘어선 죄가 되었다. 이를 보러 내려온 창조주는 인간이 신이 되고자하는 가상한 의도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고 탈무드는 표현한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외치는 전체주의의 첫번째 사례이며, 인간의 힘으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여 한 언어를 말하게 하고, 인본주의에 기초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야심으로 마치 신처럼 통치할 수 있으리라는 금도를 넘은 생각을 한 것이라고 랍비 나프탈리 쯔비 야후다는 지적한다. 나치가 넘보았던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며, 수많은 생명과 인권이 말살되며, 그들만의 오만한 전체주의와 결정주의는 결국 바벨이라는 이름으로 흑 역사의 기록이 되었다.  결국 그 시대에 언어와 민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금 세상은 파멸과 혼란 속으로 치닫게 되었다.  
 

나치와 전체주의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 존경 받던 존 달버그 액튼(남작) 경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그리스의 고대 도시 아테네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현인들을 배출했지만, 권력자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할 때, 그들의 양심이 부패하고 마음이 강팍해지고, 자신들의 제국에 대한 혼란스러운 이념들은 결국 도덕적으로 부패한 권력의 영향은 제국전체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고 강조한다(죠나단 삭스). 

나치와 패망

탈무드는 하나님이 하나님일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 말은 곧 하늘과 땅을 구분해서 생각할 때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인생의 주권자가 누구인지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영국의 랍비 J 삭스는 신의 창조의 의에 대한 존경이 멈출 때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하게 된다고 말한다. 권력과 물질에 대한 끝없는 집착과 허용되지 않는 신적 권한에 대해, 인간이 겸손해야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바벨은 인류의 첫 문명이었지만 마지막이 되지 못했다. 이상국가를 꿈꾸며 시작 되었지만 끝은 악몽이 되었다. 

록다운이 풀리니, 무심했던 마음에 세상과 자연이 사뭇 친근하고 고맙다는 자각이 든다. 모든 인생은,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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