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사건으로 다시금 인류는 언어가 혼잡해 지고 뿔뿔이 흩어지고 세상은 또 다시 혼동에 빠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 신은 다시금 창조 원래의 세상을 돌이키기 위해 노아의 자손 중에서 또 한 명의 인물을 택하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이다. 신은 새 시대를 여는 인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을 지목 하였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것과 탈무드의 랍비들의 평가는 사뭇 거리감이 있다.
하나님의 원픽, 아브라함
토라의 첫 책인 창세기 12장의 첫 구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가가 직접 그에게 하나님의 의향을 전달 하셨다. 어떤 면에서, 진정한 토라의 이야기는 신화적 요소가 사라지고 아브라함때부터 더 분명한 역사성을 담보하게 된다. 실질적인 계보와 사건과 인물들이 실제의 이름으로 역사에 흔적을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한 가정의 가장에게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신은 역시 세상을 창조한 주인답게, 지긋지긋한 세상을 내 버려두지 않고, 인간이 사는 현장에 다시금 찾아오고, 역사는 아브라함이라는 특별한 인물로부터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한다. 역시 인간의 역사는 신을 떠나서 독단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실존적 증거로 토라가 존재하고 있다고 증명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마치 그를 명백히 밝히려는 듯 아브라함을 민족의 조상으로 부르는 유대인들이 이 세상에 국가를 형성하고 그 민족으로 존재하고 지금도 팔레스타인 땅에살고 있다는 것은 한편 신기한 일이기도하다.
그래서 기독교의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알려진 독일의 칼 바르트는 신학교에서 ‘기독교 교의학’ 과목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그의 시의에게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의 시의가 그것은 바로 유대인들이 이땅에 살아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가르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예화이다.
비 영웅, 아브라함
탈무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하려는 큰 사명자로 선택 했지만 ,토라가 기록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노아나 모세와 같은 전통적인 종교적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아브라함은 선지자들처럼 왕을 늘 직면해서 그 시대의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해야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모세처럼 율법을 세우는 사람도 아니며, 노아처럼 파괴로부터 획기적인 재생산을 산출해야하는 인물도 아니다.
토라가 보여주는 아브라함은 전형적인 ‘덕의 사람’일 뿐이다. 그는 그저 나그네를 환영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조카, 롯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구출하기 위해 전쟁을 외면하지 않고, 땅 분쟁이 있을 때, 너그럽게 양보하고 네가 먼저 좋은데를 가지면 나는 나머지를 택하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죄로 가득했지만 소돔이 멸망하지 않도록 꾸준히 의인 수를 하나님에게 과감히 협상하는 설득의 사람이었다. 늦은 나이에 자식이 없자 아내의 말을 듣고 시종에게서 아들을 얻기도 하고,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했을 때도, 그가 고향을 떠날 때처럼 행선지를 몰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길을 떠나 듯 늘 신에 대한 우직한 의리를 가진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한 인간이지만, 거침없이 신에게 다가간 특별한 신뢰가 있었다. 탈무드가 그를 묘사하는 단어는 거창한 영웅적인 단어가 아니라, 아브라함은 점잖고, 친절하고, 은혜로운 인물이라고 여느 평범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면 없는 내면
탈무드는 우리가 모두 아브라함 같을 수는 없지만 그가 우리에게 보여 준 진정성과 신뢰성은 우리의 롤 모델로 늘 자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라이오넬 트리링은 진정한 랍비적인 모범은 율법을 완전하게 따르는 철두철미함 보다, 그저 그렇게 살려고 하는 존재로서 더욱 영향력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12세기의 현자 마이모니데스는 “아브라함은 심각하지 않고, 비영웅적 패러다임의 인물이었다. 그가 옳게 행동한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었다”라고 그를 평가했다. 이는 극히 인간적인 사람이 그저 해야할 일이기에 했을 뿐이지만 그래서 더욱 존경을 받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영어에 ‘사람-Person’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마스크’라는 어원의 뜻으로 셰익스피어가 “모든 세상의 무대에 모든 남자와 여성은 배우일 뿐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을 받는 존재이고, 이런 세상의 이치를 따라 당연히 살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동일한 의미를 지닌 히브리 단어로는 ‘Adam-인류, 인간’을 들 수 있는데, ‘Ben Adam’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토라가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 간섭받는 존재이다.
토라가 조명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면 쓴 배우처럼 연기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하고 직접 대화하고 마음 중심에 진정한 신뢰와 사랑이 존재하는 진정성의 상대임을 강조한다. 탈무드는 아브라함이 유대교의 창시자라고 칭한다. 그는 하나님 바로 앞에서 신을 신뢰하며 직접 관계하며 살아간 인물로 묘사한다. 그는 거창하고 소스럽기 보다는 평범하고, 선하고, 양보하고, 겸손하게 경우에 맞게 살아 가려는 새로운 영웅의 패러다임을 보여 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두 노인’에서 성지 순례의 여정에 만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느라 돈을 다 쓰고 예루살렘에 도착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 친구의 선한 삶의 모습을, 기를 쓰고 예루살렘에 당도한 다른 친구 보다 더욱 진정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그렸다.
범접할 수 없는 신앙의 영웅이라 생각 했는데, 탈무드는 어쩜 평범한 우리도, 좋은 아저씨 같은 아브라함 처럼 살려고 하다보면, 세상에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작은 영웅의 반열에 들어 설 수 있다는 따뜻한 희망을 던져 주고 있다. 샬롬!
정원일 호주이스라엘 연구소장
문화교류학박사(Grace Theological Seminary)
이스라엘 & 크리스챤 투데이 신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