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대 시드니한인회 회장선거가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열기가 감지되고 있다.
연임을 노리는 김병일 후보와 재도전에 나선 이용재 후보간의 물밑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연임에 도전하는 현 한인회장이 경쟁자를 상대로 갖는 첫 경선이라는 점에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15대 문동석 회장이 발족한 선거관리위원회가 독립 기관으로 한인회장 선거를 주관한 이래 연임에 도전한 한인회장은 항상 단독 출마해 무투표 당선됐기 때문이다.
교민사회의 인적 경제적 규모 확장과 더불어 한인회장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위상이 제고되면서 한국이나 주류사회로부터의 한인회장 대우가 달라지고 있다.
한인들이 한인회의 대표성과 입지를 제대로 인정하는 분위기도 한인회장 선거의 경쟁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인회장 선거는 과거 교민사회와 한인회 발전을 압축한 발자취이며 미래 한인회와 교민사회의 길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교민사회와 한인회의 새로운 도약과 성공을 기대하며 시드니한인회장 선거의 역사를 되돌아봤다.
▶ 한인회장 선거 방법 = 호주시드니한인회는 1968년 12월 27일 결성됐다.
우제린 초대 한인회장과 최영길 초대 총무가 추대됐다.
부회장은 없었으며 운영위원들이 의결기구로 존재했다.
당시 회장은 10-15명이 참석한 총회에서 회원들 간 서로 권유해 선출됐다.
1974년 중반 경부터 총회에서 구두 호천해 회원 거수로 뽑았다.
주로 1명만 단독 추천해서 추대하는 방식이었다.
본다이정션의 한 홀에서 진행된 8대 회장 선거시 처음 도입된 임시의장제는 선관위가 발족될 때까지 유지됐다.
이상찬 전 한인회장이 임시의장직을 가장 많이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8년 제 10대 회장 선거시 S후보와 L후보 간 처음으로 경선이 이뤄졌으며 1981년 11대 회장 선거부터 경선 열기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87년 7월 16대 회장 선거부터 독립된 선거관리위원회가 발족돼 총회와 별도의 선거일을 잡아 한인회장 선거를 주관했다.
당시 5명의 선관위원 중 호선으로 강명남 춘파한글장학회 이사장이 초대 선관위원장에 선발됐다.
1990년 17대 조민구 회장 재임시 한인회장 선거 과열을 방지하기 위해 대의원회에서 회장을 선출하는 간선제가 총회에서 통과됐다.
대의원회는 이상찬 의장, 강명남 장영희 부의장 아래 각 지역 및 단체 대표 약 180명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간선제로 첫 선출된 18대 추은택 한인회장은 과다 비용 지출 등의 간선제 폐단을 없애고 높아진 한인회 위상에 걸맞는 선거제도 개선을 내세워 간선제를 폐지하고 직선제로 복귀시킨다.
이 때 한인회 이사회도 첫 도입됐다.
??한인들의 친목도모와 권익신장을 위한 순수 친목 단체였던 초기 한인회의 총회 장소는 식당이나 총영사관 등이었다.
나중에 한인회관 건물이 마련된 뒤에는 한인회관이 주로 이용됐다.
▶ 회원 자격과 선거권 부여 = 초창기에는 한인이 몇 명 없어서 영주권자, 시민권자 구분없이 한인이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총회 참석 회원은 1975년 유의규 7대 회장까지 많으면 30명 참석했다.
1976년 한인회 정회원은 가입신청서를 내고 정기 운영위원회의 심사 인준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1976년 8월 15일 정기총회에선 준회원 규정을 삭제하고 회원 자격을 영주를 목적으로 호주에 거주하는 자와 그 가족, 한국의 지상사 주재원과 그 가족 등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했다.
베트남전에 참가했던 군인들과 기술자들이1975, 76년 호주로 대거 입국하고 호주 정부가 1976년 1월 호주건국기념일을 기해 1차 사면령을 발표하면서 회원들은 급증한다.
이전까지 50명 이하였던 회원들이 1976년 8대 회장 선거시 수백명으로 급증한 것이다.
회원은 회비 납부 의무를 졌다.
작고한 최영길 전 한인회장에 따르면 초대 한인회부터 한인회비를 10달러 받아 5달러는 한인회 운영비로 쓰고 나머지 5달러는 한인회관 건축기금으로 적립하기 시작했다.
1975년 유의규? 회장 재직시 한인회비를 12달러로 증액했다.
이상찬 회장 재직시 회비를 20달러 받았던 적도 있으며, 1981년 12대 한인회장 선거시 회비 납부자에게만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18대 재임시도 회원 자격을 회비 납부자로 제한하면서 19대 회장선거시 회비 대납 파문의 불씨로 작용했다.
19대 이배근 회장 재직시 회원 자격을 영주권자와 시민권자 중 회비 납부자로 한정했으며, 2003년 24대 백낙윤 회장 재임시 회원 자격을 영주권자와 시민권자로 제한하는 정관이 총회에서 의결됐다.
한인 유학생들 많이 입국하면서 회비 대납과 학생 동원 문제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회 역사상 회비는 연 10달러 이상이었고 한인회 초기에는 납부 성적이 비교적 좋았지만 근년들어 납부율이 5%에도 못미치고 있다.
▶ 부회장제 변화 = 부회장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7대 유의규 회장 때부터 였다.
유 회장을 보좌한 양정집 부회장이 처음으로 한인회 부회장직을 수행했다.
1976년 8월 정기총회에서 부회장이 1명에서 2명으로 증가됨으로써 8대 신경선 회장 재임시 부회장이 2명(이상찬, 백진기 부회장)으로 늘어났다.
부회장은 9대 이상찬 회장 재직시 다시 1명으로 감소됐다가 1993년 18대 추은택 회장 재임시 1, 2부회장으로 증원함으로써 19대 이배근 회장시 김재리 1부회장, 김문수 2부회장 2명이 역임했다.
부회장 2명 선발제는 1997년 21대 이동석 회장까지 이어지다가 22대 이재경 회장부터 다시 1명으로 줄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불행한 선거사 = 1981년 12대 한인회장 선거부터 과열 양상이 나타나면서 선거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본격 노출되기 시작했다.
당시 C후보와 M후보가 격돌한 선거에서 총회 참석자 286명 중 투표 진행 시간이 많이 지체돼 상당수 참석자가 자리를 뜨는 바람에 투표 참가자는 200여명에 불과했다.
결국 C후보가 140표만 얻어, 과반인 144표에 4표가 부족하게 됐다.
이에 임시의장이 다수 득표로 하자고 제의했지만 참석자들이 반발해 당선 공고없이 총회가 폐회됐다.
이에 한인사회 지도자들이 중재에 나섰으며, 결국 M후보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함으로써 C후보가 당선됐다.
13대 한인회장의 부정의혹에 불만을 품은 운영위원 전원 사퇴 파행은14대 한인회장 선거에도 영향을 미쳤다.
C후보, J후보, K후보 등 처음으로 3명의 후보가 격돌한 14대 선거는 C 후보가 다득표했으나, 과반 득표자가 없어 당선자가 나오지 않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결국 몇 개월 후인 1984년 2월 18일 재선거에서? 962표를 획득한 C후보가 9표 차로 최다득표했다.
하지만 953표를 획득한 J후보가 현장에서 C후보가 중임금지 규정을 위반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임시의장이 이를 수용해 J후보의 당선을 선언했지만, C후보는 당선 공고에 불복했다.
한국의 변호사에게 서면으로 법리해석을 의뢰하는 등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양 후보측이 각자 운영위원회를 구성, 약 1년간 운영하면서 2개의 한인회와 2명의 한인회장이 양립하는 초유의 불상사가 발생했다.
결국 한인들의 따가운 비난에 직면한 2명의 회장은 1985년 2월 임시총회를 열어 J회장이 한인사회의 화합을 위해 용퇴를 결심하면서 사태는 마무리했다.
1999년 22대 회장 선거시 정족수 11명인 선관위를 3명의 위원만으로 구성해 회장 입후보를 받아 파장이 일었다.
단독 입후보 한 L씨를 정족수 미달의 선관위가 회장으로 선출했으나 임시총회에서 회원들이 재선거 실시를 요구하며 L씨 당선을 무효 의결했다.
결국 전직 한인회장들을 중심으로 ‘한인회 수습위원회’가 결성되고 조민구 전 한인회장이 보궐 한인회장으로 선발돼 일부 회원을 제명 처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분란은 정리됐다.
▶ 희망의 선거사 = 첫 선관위는 1987년 캠시 오리온센터에서 2304명의 유권자가 참가한 가운데 16대 조기덕 회장을 선출했다.
16대 회장 선거는 적은 인원, 최저 경비로 부작용 없이 정확하게 당락을 결정, 어떤 추문이나 오해의 소지가 없는 깨끗한 모범적인 선거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6월 치뤄진 26대 한인회장 선거엔 3명의 후보가 출마해 치열한 경합이 전개됐다.
3명의 후보가 출마한 것은 14대 선거에 이은 두번째였다.
경쟁이 격화되면서 선거인 등록자도 역대 최다인 1만 2298명을 기록했다.
김순식 선관위 위원장은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소를 6곳에 설치해 최대한 많은 유권자들이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캠시, 스트라스필드, 이스트우드, 시티, 파라마타, 채스우드에 투표소가 마련되고 선거 전날 부재자 투표도 한인회관에서 실시됐다.
그럼에도 부정이나 불법 선거 등 특별한 잡음없이 조용한 선의의 경쟁이 펼쳐졌다.
등록 유권자 중 4087명이 투표에 참가했으며, 1702표를 얻은 승원홍 후보가 26대 한인회장에 당선됐다.
박은덕 부회장은 최초의 여성 부회장이 됐다.
?▶ 가장 치열했던 회장선거 = 1993년 LB후보와 LJ후보가 격돌한19대 한인회장 선거는 역대 선거 중 가장 치열한 경합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선거권은 한인회비 10달러를 납부한 회원에게만 주어졌기 때문에 두 후보는 회원들의 회비를 대납하면서 유권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상당히 과열된 선거전이 전개되면서 회비 대납문제가 처음으로 불거졌다.
양측 모두 회비를 대납해 상호 문제 제기는 없었지만 선거비용이 두 후보 합쳐서 100만 달러에 달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유학생들도 동원됐다.
선거인 명부 등록 요건도 이름과 주소 또는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으면 될 정도로 간편해 이중 등록자가 매우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인 명부 1만 여명 등록에 투표자가 4000여명이었다.
선거 결과 두 후보가 각자 약 2000표를 득표해 약 200여표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
워낙 치열한 접전을 벌인 후유증으로 차기 20대 한인회장 선거에선 40대 후반의 김재리 후보가 단독 출마해 무투표 당선됐다.
▶ 행운아, 불운아 = 역대 한인회 중 회장이 2명인 경우는 6대와 14대 2번 있었다.
두번 모두 한인회를 둘러싼 분쟁이 불거졌다.
6대 땐 회장이 퇴임하고 차기 회장이 잔여임기를 채웠으며 14대 땐 한인회장이 2명 공존했다.
???최다선 한인회장은 2, 3, 4, 6대 4회 집권한 최영길 회장이며 최영길, 신경선, 조민구, 이배근 전 회장은 작고했다.
백낙윤 회장은 본격적인 선거제가 도입됐음에도 한번도 경선을 치르지 않고 단독 출마해 2번이나 무투표 당선, 연임하는 행운을 누렸다.
한인회장 및 부회장 입후보 공탁금은 1990년대 초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회장이 약 1만 달러 부회장이 약 3천 달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경 회장은 22대 선거에서 30만 달러의 한인회관 건립기금 기탁을 공약해 당시 유력한 경쟁자였던 백낙윤 회장의 불출마를 유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회장 임기는 처음에 1년이었으나 1981년 12대 조기성 회장시 2년으로 연장됐다.
제 13대 한인회장 경선에서 민성식 회장이 당선됨으로써 최초의 임기 2년 한인회장에 취임했다권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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