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전 교환교수로 호주에 와서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 중 하나가 커피에 관한 것이다.
지금도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아메리카노’ 대신 ‘롱 블랙’을 주문해야 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혼자서 처음으로 카페에 가서 ‘숏 블랙’을 주문하고 난 후 황당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직도 롱 블랙과 숏 블랙이 왜 이런식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절반 농도의 에스프레소 커피’라는 인터넷 사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롱’과 ‘숏’은 커피의 양이 아닌 물의 양을 말하는 것인 듯 하다.
즉 농도를 묽게 하기 위해 물을 많이 넣은 커피는 긴 커피잔을 사용하게 되고, 진한 커피는 물의 양이 적으니 짧은 커피잔에 제공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숏 블랙을 주문했던 것일까? 짧은 영어 실력과 외국 상식 때문이겠지만 ‘롱’과 ‘숏’의 의미를 커피를 끓이는 시간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즉, 오래 끓인 커피는 당연히 진할 것이고 잠깐 끓인 커피는 연할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경험을 말하고 있는지 짐작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된다.
한방 병원에 오시는 많은 환자분들의 질문 중 하나가 “이 약을 어떻게 끓여서 복용하나요?”라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약을 끓여 먹으면 효과적인 것일까? 어머니께서 약탕기에 끓인 약을 삼베 보자기로 짜는 모습을 직접 보신 경험이 없더라도 TV 역사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시지 못한 분은 아마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았지만 김이 무럭무럭나는 한약이 담긴 삼베 보자기를 떠올리시면서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정성껏’ 한약을 달였을 것이라고 누구든 짐작을 하실 것이다.
‘정성껏’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겠지만 많은 분들이 이 단어를 ‘오래’ 끓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하지만 ‘롱’ 블랙이 오래 끓인다는 뜻이 아닌 것처럼 ‘정성껏’ 달인다는 것도 장시간 끓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환자분들이 물을 얼마나 붓고 몇 시간 끓인 후에 복용을 하시라는 주의를 들으셨어도 막상 한약을 끓이실 때는 ‘정성껏(?)’ 끓여서 복용하셨다고 병원에 오셔서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환자분을 뵙는 것이 어렵지 않다.

물론 많은 한약들이 오래 끓여질 수록 유효 성분이 많이 추출되므로 장시간 끓이시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옳은 방법이 되겠으나 한약 중에는 오래 끓일 경우 유효성분이 모두 공기 중으로 달아나 버리는 것이 있다.
도대체 한약을 어떻게 끓이라는 말일까?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 주제는 최대한 피하고 있으나 죄송스럽게도 복용할 약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약을 처방한 한의사이므로 한약을 달이는 시간은 반드시 한의사의 지시에 따라 주셨으면 한다.

다시 한번 한약을 짜시는 어머니나 TV 드라마로 돌아가서 또 뭔가 잘못 된 것은 없을까? 있다면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어지는 글을 읽으시기 전에 잠시 스스로 짐작을 해 보셨으면 한다.
혹시 집히는 부분이 있으신지?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사항은 바로 한약을 ‘짜는’ 것에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에 차이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한약을 처방받으면 삼베 보자기와 약을 짤때 사용할 막대가 함께 제공되기도 하니 말이다.
유일하게 머리 속에 떠오는 끓인 한약을 짜야할 이유는 끓인 약에 남아있는 한약이 아까우니 알뜰히 짜내겠다는 것 밖에는 없다.
혹시 그 외에 다른 이유가 떠오르시는지? 끓인 약을 짜면 추출된 한약을 약간 더 얻을 수는 있겠으나 많은 한약이 식물라는 점을 잊지 마셨으면 한다.

즉 최근 연구에 따르면 끓인 한약을 짜면 섬유소라는 물질이 식물로부터 다량 추출되는데, 이 섬유소들이 약의 흡수를 방해하는 요소라는 것이다.
약을 짜면 추출된 한약이 갑자기 뿌옇게 되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이다.
이 변화를 한약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 범인은 유효 성분의 흡수를 방해하는 섬유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약에 남은 한약이 아까우시다면 한약을 달여서 삼베 보자기에 싼 상태로 약이 복용하기 적당할 정도로 식을 시간동안 그릇에 받혀두는 정도가 충분하다고 한다.

커피 메이커에 대해선 잘 알지도 못하고 자세히 관찰해 본 경험도 없지만, 끓여진 커피를 다시 짜는 과정은 없는 듯하다.
커피를 사랑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도 끓인 커피빈에 남은 커피마저 짜서 마시고 싶을 정도의 커피 애호가는 없었던 것일까?
조정훈글쓴이 약력경희대 한의대 졸업 & 동대학 박사전, 경희대학교 교수(한방부인과 전공)현, 월드씨티 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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