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찾겠노라 말달리던 선구자’들이 자유시에서 주도권 싸움으로 천명 이상 부질없이 목숨을 잃고 지리멸렬 됐다.
(전편 이야기). 그러나 만주(동북아) 방면에서는 잔여 독립군이 계속 활동을 하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도 그곳에서 안정을 찾고 평온기를 맞이한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개인의 부농화를 묵인하지 않는다.
토호들의 땅을 몰수하고 외지로 추방했다.
이를 ‘토호청산’이라고 불렀다.
농업은 점차 꼴호즈(집단농장) 중심으로 바뀌었다.
타슈켄트에는 바자르(시장)가 많다.
먹거리와 생활필수품을 주로 판다.
이런 바자르 중 가장 큰 곳이 ‘꾸일육’ 바자르다.
여기에는 고려인 상인이 많다.
이곳을 조금 지나면 *김병화 농장이 있다.
*김병화(1905~1974) 농장‘이중노력영웅’ 김병화는 1905년 연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에 동갑내기 김유겐과 함께 이준집 대장이 이끄는 ‘동지’라는 극동한인 빨치산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 부대는 680명 규모의 ‘솔밭관 빨치산부대’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1921년부터 김병화는 이 조직에서 활동하다가 1931년 군에 입대했다.
1939년에 복무를 마친 김병화는 ‘새길’ 꼴호즈(집단농장)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 마침내 ’북극성’ 꼴호즈의 지도자가 되었다.
김병화는 꼴호즈의 농업 및 건설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다.
1956년에 소련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에 소개되면서 김병화는 전 소련연방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쉬켄트 치르칙 구역에 자리잡은 북극성 농장의 경이로운 생산역사는 김병화가 대표로 선출되면서 시작된다.
더구나 이 농장은 늪지대 갈대밭을 매립한 후 물길을 놓아 조성한 곳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해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하고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2차대전 중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10배 증가시켰다.
1946~50년 사이엔 1헥타르당 4-5톤의 쌀을, 많을 땐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그 결과 1948년에는 북극성 농장에 대한 소식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정부도 외국 귀빈들이 오면 이 농장을 시찰하게 했다.
북극성 농장은 해가 갈수록 번영했다.
1950년대 들어와 발전을 거듭하던 북극성 농장은 큰 변화를 맞는다.
재정적으로 빈곤한 타민족 꼴호즈들이 북극성 꼴호즈에 통합된다.
그럼에도 다민족 꼴호즈의 관리위원장으로서 김병화는 여러 민족의 힘을 합쳐 농업, 목축, 건축, 문화 등 각 부문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다.
그 결과 북극성 꼴호즈를 소련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김병화는 우즈벡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과 중앙검사위원, 1946년부터는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대의원(5~8기)으로 활동한다.
소련당국은 김병화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중노력영웅 칭호 외에 4개의 레닌훈장과 1개의 시월혁명훈장, 2개의 노력적기훈장, 1개의 노력표식훈장 등을 수여했다.
우즈벡에서 노력훈장을 탄 인물 650명 중 139명이 고려인이다.
      1974년 김병화가 지병으로 사망한 후 북극성 꼴호즈의 명칭은 ‘김병화 꼴호즈’로 바뀌었고 타쉬켄트의 한 거리와 타쉬켄트주 우르타치르치크 지구 투야부구스 촌락에 있는 고등학교의 명칭에 ‘김병화’란 이름을 붙였다.
중앙아시아 한인사회의 등대역할을 한 곳도 김병화 꼴호즈였다.
현재는 한국관광객이 단골로 찾는 장소가 되었다.
김병화 집단농장우즈벡 당국에서는 김병화 박물관과 가상체험관을 만들었다.
가상체험관에서는 이러한 김병화 농장의 주요 건물들과 들판을 통해서 농업체험을 할 수 있다.
김병화 농장을 육박하는 ‘황만금 농장’도 있다.
황만금(1921~1997)은 김병화와 더불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꼴호즈(집단농장) 지도자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후 얀기율 목화공장의 공급자로 노동활동을 시작한 그는 타쉬켄트 철도관리경영 책임자, ‘레닌의 길’ 꼴호즈 지도자, 북치르칙 구역 당 관리자로 일하며 지도자 경험을 쌓아 나갔다.
1953년에 타쉬켄트주 북치르칙 구역의 ‘쁠리따젤’ 꼴호즈를 맡기 시작하며, 황만금의 제 2인생이 시작되었다.
황만금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꼴호즈는 번영했으며 당국의 인정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7년 황만금은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여 당국은 그에게 1983년에는 소련 내각위원회 국가상을 수여했으며, 이후 3차례 레닌훈장과 10월 혁명훈장, 정부표창을 수여했다.
‘쁘리따젤’ 꼴호즈의 지도자 황만금은 고려인협회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공산당 중앙위원 회원,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 연방회의 대의원을 역임했다.
황만금은 노동자로 시작하여 소련에서 가장 높은 생산량을 기록, 노력영웅의 칭호를 받았다.
쁠리따젤 농장은 친북성향의 고려인이 많았으며 한 때는 1만 5천명의 고려인이 이 농장에서 일했다.
현재는 5~6천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황만금과 그의 꼴호즈(집단농장)김병화는 철저한 사회주의자였으나 황만금은 고르바초프 시절에 자본가로 변신한 사람이다.
자녀교육도 김병화는 자식 둘을 사회주의 교육을 시킨 후 농장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하며 지도자로 키웠다.
반대로 황만금은 자식들에게 돈 버는 법에 일찍 눈을 뜨게 하여 개혁개방 후 김병화 자손은 어렵게 살고 황만금 아들은 대규모의 토마토 농장 등을 경영하며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역경에 처해 있어도 최고로 치고 올라서는 능력을 보여주는 게 우리 민족의 저력이다.
고려인들도 조선족처럼 전투기를 생산하는데 많은 기부금을 냈다.
자기네 말로 “남한에서 미국놈들 몰아내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남한에서는 반공교육으로 공산주의 국가는 다 적으로 생각했는데 그 수괴 국가인 소련 곡창지대에서 가장 열심히 일을 하여 소련을 먹여살린 농민이 우리민족이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최초로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우리나라 사람은 1200여년전 신라 고승 초(704~787)였다.
그는 인도로 가는 길에 이 곳을 들렸으며 나중에 ‘왕오천축국전’ 이란 저서를 남긴다.
현재는 우즈베키스탄에 약 23만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구소련지역 중 최대의 집거지다.
이 나라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4.5배이고 인구 2천 8백여만이 살고 있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다.
고려인은 2차 대전 중 군수공장 등에서 일했고 차별대우를 받았으나 1956년 후루시쵸프 시절 공민권을 회복한다.
소련시절 고생하면서 고려인은 한(韓)민족 언어와 문화를 많이 상실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어교육과 문화활동이 활발해진다.
한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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