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을 만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슴 떨리는 일이다.
정치인이나 민감한 사안과 관련된 인물을 만날 때와는 달리 ‘예술인’을 만날 때는 ‘기자와 취재원’이라는 딱딱한 관계를 내려놓을 수 있어 좋다.
아니 오히려 내려놓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누구나 만나고 싶어할 시드니심포니오케스트라의 세계적인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정작 인터뷰의 기회는 다른 기자에게 양보하게 돼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본지 양윤서 인턴기자의 영어 인터뷰 녹음 파일을 기초로 본 기자가 정리 및 편집했다.
-편집자 주2010년 5월 5일. 모두가 즐거운 어린이날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언제나 외딴 섬에서 세인의 관심 밖에서 외로이 지내던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한센병 환우들은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받게 된다.
세계적인 지휘자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가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국민 가수 조용필과 함께 아름다운 섬 소록도에 발을 내 딛는다.
아쉬케나지가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소록도 주민들에게 베토벤의 대표적인 교향곡인 5번 ‘운명’을 연주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했다.
“(소록도에서의 경험은) 매우 감동적이었어요. 일본에 살다 자작 작위를 갖고 있는 영국인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분(레이디 R 재단 회장인 로더미어 자작부인을 의미-편집자 주)이 고국에 중요한 이벤트를 열고 싶어해서 성사가 됐어요. 한국어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이죠. 특히 소록도 주민들처럼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분들에게 도움을 주길 원했어요.”IMF 시절 다수의 외국 뮤지션들이 출연료 인하로 이미 일정이 잡힌 공연까지도 줄줄히 취소했을 때에도 ‘청중과의 약속’이라며 한국을 찾았던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소록도 주민들은) 아주 좋은 분들이었죠. 어떤 분들은 휠체어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했어요. 질병을 앓고 계셨지만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어요.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해 드렸더니 정말 행복해 하시더군요. 소록도도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어요. 매력적(gorgeous)이고 환상적인(fantastic) 곳이었죠.”그는 소록도 공연 당시 함께 했던 국민 가수 조용필에 대해서도 “그를 매우 잘 기억하고 있다.
정말 다정한(friendly) 사람이었다”고 밝혔다.
75세의 백발이 성성한 노장이지만 그가 지휘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귀엽다”고 말한다.
이처럼 ’귀여운’ 지휘지만 그가 발산하는 음악은 장중하고 정확하고 깊이 있다.
때론 절도 있게 때론 부드럽게 오케스트라를 자신의 몸의 일부인양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얼굴 옆면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훔칠 때면 20대 젊은이의 패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러시아 태생인 그는 원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다.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이며 모스크바 음악원에 진학 1955년 제 5회 쇼팽 피아노 콩쿠르 2위, 1956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1962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는 1위를 차지한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존 오그던과 공동 수상-위키피디아 참조)지휘자를 일컬어 흔히 ‘마에스트로’라고 칭한다.
남자의 3대 로망 중 하나라는 지휘자는 비단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한번 쯤은 꿈꿔 봄직한 직업이다.
서울시향의 정명훈 지휘자의 말처럼 지휘자는 오케스트라 내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내지 않는 연주자’이지만 어찌보면 그 많은 악기의 ‘모든 소리를 혼자서 연주하는 연주자’라 할 수 있다.
피아니스트로도 ‘살아있는 전설’의 반열에 오른 그는 언제부터 지휘자의 꿈을 가지고 있었을까?“지휘자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 목표를 가지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어려서부터 피아노 음악보다 오케스트라 음악에 훨씬 관심이 가더군요. 피아노 실력이 정말 빨리 늘었고 성공적인 피아니스트가 됐기 때문에 내가 지휘를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그냥 평생동안 오케스트라 음악이 연주되는 연주회에 가고 오케스트라 음악 녹음과 악보들을 수집하는 데서 그칠 줄 알았죠. 지휘자가 된 건 정말 우연이에요.”“인생은 때론 즐겁지만 때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죠. 제 경우는 행운이었어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 우연히 뜻하지 않게 지휘를 시작하게 된거죠.”그가 시드니 청중들의 귀를 사로잡은 지 올해로 5년째다.
그가 지휘봉을 잡은 후 5년 동안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우뚝 섰다.
그러나 그는 올해를 끝으로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떠날 예정이다.
시드니 클래식 팬들로서는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오페라하우스를 떠난 후 미래 계획을 물어봤더니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이별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계약) 끝나면 뭐 할 거냐구요? 우선 자살하지는 않을 겁니다.
(큰 웃음)”“저도 정말 슬프지만 언젠간 돌아와서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다시 지휘하고 싶어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정말 좋은 친구였어요. 정말 훌륭한 오케스트라였고 제가 한 모든 공연이 기억에 남아요.”클래식 공연장에 가보면 젊은이들보다는 중장년층이 압도적으로 많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클래식 음악이 외면 받는 건 아닌지, 클래식이 이대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닌지, 이에 대한 마에스트로의 생각을 물었다.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요.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도 못하는데 제가 어떻게 예측하겠어요”라면서도 “확신하건대, 우리가 하는 음악(클래식)은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이 음악은 살아 남을 겁니다.
(클래식은) 우리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며 우리 영혼의 삶을 반영하는 것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거장으로서의 의지가 느껴졌다.
이탈리아 음식 다음으로 한국 음식과 중국 음식을 즐겨 먹는다는 그는 언제나 유쾌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포근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음악을 대할 때만큼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수많은 작곡가를 두루 섭렵한 그이지만 아직도 연주해 보지 못한 음악이 훨씬 많다며 언제나 새로운 것이 자신 앞에 찾아온다는 그…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이기에 그의 음악은 70대 중반의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만큼 역동적이고 힘이 느껴지나 보다.
수많은 명반을 남기며 이미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한 그이지만, 그의 ‘희망’과 ‘감동’의 물결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취재: 양윤서 인턴 기자, 기사 작성: 서기운 기자edit@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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