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잔디밭에 민들레가 핀 것을 봤습니다.그걸 보고 당연히 봄인 줄 알았지만 불현듯 호주는 지금 가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3월 말, 봄이 한창이던 때 한국에서 호주로 떠나 헛갈렸나 봅니다. 이렇듯 한국과 정반대 계절인 호주는 도심에서 참다운 가을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을 양’과 어렵게 약속을 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교외로 나가 데이트를 했습니다. 그 후일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데이트 첫째날, 단풍도 함께 했던 소풍
요새 한국에서는 완연한 봄 날씨를 맞아 형형색색으로 만개한 벚꽃, 진달래 등을 보러 전국 각지로 이리저리 나들이를 떠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푸르기만 했던 산책로와 들판을 각양각색의 꽃들이 분홍색, 노란색 등 화사한 색의 물감으로 예쁘게 색칠하고 있을 겁니다. 반면 다소 쌀쌀한 날씨의 호주는 이제 완전히 가을에 접어들었습니다. 수 미터나 되는 키 큰 나무의 잎들이 불그스름한 갈색과 짙은 노란색으로 호주의 드높은 창공을 수놓고 있습니다. 호주에서의 단풍과 가을 나들이가 상상이 잘 안 된다고요? 제가 이제부터 소개하겠습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블루마운틴은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관광 명소입니다. 저는 블루마운틴에서 자리를 조금 옆으로 옮겨 마운틴윌슨(Mt. Wilson)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관광객들도 그리 많지 않아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조용히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도로를 따라 좌우에 높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그 나무들에서 살랑살랑 떨어진 잎사귀들이 길에 즐비해 걸을 때마다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서 가을이 왔음을 몸소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주변엔 잘 정돈된 정원이 여러 곳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찾던 단풍도 많이 만나볼 수 있고 향긋한 꽃향기도 맡을 수 있습니다.
다음 여정은 블랙히스(blackheath)입니다. 동양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서양인들이 주를 이루어 백인들의 문화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조금 후에 소개할 로라 마을과는 달리 상업화돼 있지 않아 아담하고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보존과 보수가 잘 돼 있어 그냥 보기엔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아 보이는 대부분의 건물들이 약 100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니 참 놀랍습니다. 여기에서는 중심 도로를 한 블록만 지나면 울긋불긋 단풍이 든 한국의 도로변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2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을 들여다보면 진정한 ‘단풍놀이’를 즐길 수 있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로라(Leura)마을입니다. 블루 마운틴으로 가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카툼바(Katoomba)와 같이 가벼운 산행 차림을 한 여행객들이 많습니다. 빨리 겨울이 시작하고 늦게 겨울이 끝나 쌀쌀할 것만 같은 곳이지만 길거리 악사들이 많아 낭만으로 가슴이 따스해집니다.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청년이 악보를 펼치고 상기된 얼굴로 열심히 트럼펫 연주를 하고 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음은 마운틴토마(Mt. Tomah)에 있는 보타닉 가든(Botanic Gardens)입니다. 오페라 하우스 옆에 있는 로열보타닉 가든과는 다른 정취를 이곳에서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도심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고 식물이 널찍널찍 자리 잡고 있다면, 웅장한 블루마운틴을 바라볼 수 있는 이곳은 오밀조밀하게 꽃과 나무가 배치돼 있어 아기자기한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은 잠시 들렀던 사과 농장입니다. 매점에는 꿀, 잼, 지역 농산물, 애플파이를 팔고 있었습니다. 개당 10달러에 판매되는 애플파이의 달콤한 냄새가 허기진 저의 배를 아우성치게 해서 다소 힘들었습니다. 매점 오른편에는 사과 농장이 있습니다.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상상했지만 이미 수확 철이 지난 탓인지 일렬로 서있는 나무에 사과가 전혀 없어 약간 실망했습니다. 매점 뒤편으로는 작은 호수가 있습니다. 갈대처럼 생긴 긴 식물들이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마한 공간에 자라있어 참 예뻤습니다.

비록 호주의 단풍나무는 한국과 달리 길가나 숲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나가다가 드문드문 만나는 단풍이기에 더 반갑습니다. 호주에서 단풍을 볼 수 있는 기간은 3주 정도입니다. 4월 중순에서 5월 초까지라니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어떨까요?

 
데이트 둘째 날, 가을과 감 따며 폴짝폴짝
가을이 제철인 과일은 배, 포도, 사과, 귤 등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가을하면 떠오르는 과일은 단연 ‘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가을만 되면 감을 세 상자씩이나 샀기 때문입니다. 어떤 감은 단감으로 바로 먹었습니다. 다른 감은 식탁 가장자리에 몇 주 정도 뒤집어 놓고 홍시로 먹었습니다. 또 어떤 감은 깎아서 베란다 한쪽 그늘진 곳에 잘 말려 곶감으로 먹었습니다. 저는 초겨울이 될 때까지 수많은 감을 먹었습니다. 이렇게 어느덧 ‘감’은 저에게 가을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호주에서 맞이하는 첫 가을을 느껴보기 위해 단풍놀이 겸 가을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풍과 낙엽만으로는 가을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저에게 가을은 단풍이 아니라 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픽톤(Picton)에 있는 감 농장을 다녀왔습니다. 저번에는 단풍 구경으로 가을을 ‘체감’하고 왔다면, 이번에는 감따기로 가을을 어루만지고 곱씹어보며 ‘체험’하고 온 셈입니다.

예상 외로 농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수확의 즐거움을 느껴보라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족끼리 단란하게 주말을 즐기러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부모님은 안중에도 없는 듯 개구쟁이 아이들은 저들끼리 신나게 돌아다녔습니다. 한편 벌써 농장 체험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의 양 손에는 감이 가득 담긴 비닐봉지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우리 집이 그리 했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세 가지의 다채로운 감 맛을 두고두고 느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측해 봅니다.

가져온 감을 계산하는 농장 사무실에서 감나무가 줄지어 자라있는 곳까지 트랙터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서울에서만 자라 농촌에 가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경운기조차도 타 본 적이 없어 트랙터에서 전해지는 생소한 떨림으로 온몸이 덜덜거렸습니다. 농장에서 딴 감은 마음껏 맛볼 수 있다는 벅참에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한 가지에 너댓 개의 탐스러운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감나무가 수십, 아니 수백 그루 있는 것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래해졌습니다.

시중에서 파는 감은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동그랗게 생겨서 감은 다 그렇게 생긴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직접 가서 보니 감도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성인 남성의 두 주먹보다 큰 감부터 귤처럼 작은 감까지 다양한 크기가 있었습니다. 꼭지에서부터 과육의 중간 부분까지 일자로 움푹 들어가 있어 마치 아기의 엉덩이처럼 생긴 감도 있었습니다. 전래동화 혹부리 영감에 등장하는 혹처럼 몸통에 두 개의 혹을 달고 있어 마치 노래 잘할 것 같이 생긴 감도 있었습니다.

수천 개의 감이 서로 다른 독특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듯이 그 맛 또한 다양했습니다. 단감은 수박과도 같이 풍부하고 시원한 과즙을 품고 있어 호주 감 맛은 한국과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 익어 썩어 있거나 벌레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적당한 홍시를 찾기는 좀 어렵지만 허리를 굽히고 잘 찾다보면 발견할 수 있는 홍시의 맛은 일품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감 상태는 단감과 홍시 사이입니다. 너무 단단하지도 또 너무 물렁하지도 않은 단감에서 홍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의 감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감은 안타깝게도 나무 높은 곳에 열려 있어 연신 점프를 하며 감을 따려고 애썼으나 실패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나무 꼭대기에 있는 감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는지 그 감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기묘한 자세로 나무에 올라타 감을 따는 도전적이고 호탕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 멀리서는 목말 태운 소년의 다리를 잡고 높이 있는 감을 따보라고 외치는 분이 보였습니다. 참 다정한 아버지고 화목한 가정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는 이번 감 농장 체험으로 올해 가을을 몸소 경험하고 왔습니다. 만약 감을 좋아하지 않으시면 꼭 감 농장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만일 가을에 수확하는 과일을 좋아하지 않으시면 꼭 가을이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과일이 지천에 널려있어 눈이 즐거운 공간. 그 과일을 양껏 먹을 수 있어 입이 행복한 곳. 여태껏 보지 못했던 그 과일의 생경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장소. 어른, 꼬마할 것 없이 가족 구성원 모두가 만족하며 주말을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기회. 과일 농장 체험 어떻습니까?

 
감 농장 투어 Tip!
감 농장에 갈 때 꼭 챙겨가야 하는 물건은 과도다. 칼이 없으면 감을 따도 제대로 먹기가 힘들 것이니 반드시 준비하는 것을 추천한다. 또한 만약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작은 나무 바구니도 가져가면 좋다. 농장에서 주는 하얀 비닐봉지보다 들고 간 바구니에 감 몇 개를 담아서 촬영하면 그림이 훨씬 예쁘다. 참고로 감은 1kg당 7달러에 구입할 수 있다.

취재 협조=대한관광여행사(T9235-0000 M0411 205 599)
글 문정남 인턴기자 edit@hanhodaily.com 사진 김서희 기자 sophie@hanho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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