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코하마국립대학에서 강연하고 있는 박종석씨
재일동포 박종석은 1951년 생으로 일본 이름은 아라이(新井) 쇼지였다. 당시 재일동포는 육체 노동이나 저임금 직종에서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 박종석의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행상이었다 그는 9 형제 속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해키난고등학교 상과 학생 5백명 중 5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반에서는 모범생이고 반장이었다. 그는 좋은데 취직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게 꿈이었다. 그는 197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벌기업인 히타치(日立) 취업시험에 합격했다. 히타치는 그에게 1주일 내로 호적을 제출하라고 했다. 
 
한국에 호적이 있는 아라이가 시간 내에 제출을 못하고 그가 재일한인이란 것을 안 히타치 회사는 그의 입사를 거부했다. 이것은 한인 청년들이 당시 겪는 일이었다. 아라이 군도 취업을 포기했다. 이것을 안 일본인 동급생들이 앞장 서고 동포학생들이 합세해 ‘박군을 둘러싼 모임’을 결성 했다. 재일대한기독교협회장인 이인하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요코하마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모임은 이 사건을 박군 개인 일로 보지 않고 재일 한인 전체의 일이고 일본 사회의 일로 받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아라이 군은 자기의 본명 ‘박종석’을 회복하고 한인으로서 일본의 차별대우에 맞서는 투쟁을 시작했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호응해 ‘박군을 둘러싼 모임’이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들은 월 1회 집회를 갖고 히다치를 규탄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박군의 사정이 일본 사회에 알려지자 일본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양식있는 사람들이 후원자, 지지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수가 증가해 갔으며 일본의 큰 도시 히다치 지사와 공장이 있는 곳에 ‘박군을 둘러싼 모임’이 전국에 8개나 조직되었다.
 
▲ 재일동포를 울리는 차별 200 가지
이 사건을 알게 된 동경고등재판소 나카히라 겐이치 판사는 판사직을 사퇴하고 박군의 주임 변호사를 자청했다. ‘박군을 둘러싼 모임’은 히다치를 요코하마 지방재판소에 고소하는 한편 일본 사회에 호소했다. 이에 대하여 히다치 회사는 오히려 박군이 가명인 일본 명으로 응시를 했고 호적란에 출생지를 기재하는 등 거짓말을 하였기에 이런 사람을 회사원으로 채용할 수 없다고 했다. 박군 사건이 한국에 전해지자 한국 내에서 히타치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기독교 기관을 통해 미국에 전해지자 미국에서도 히타치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일본과 히타치는 굴복했다. 요코하마 재판소는 히타치 측에 박종석 군을 채용하고 합격 발표일부터 3년간 봉급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박종석 사건이 시작되었을 때 민단과 조총련은 외면하고 있었다. “이런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냉소했다. 그러나 민단도 조총련도 관계 안했던 한낱 청년을 중심으로 한 이 사건은 민단과 조총련이 생각도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었다. 박종석 사건이 끝나자 ‘박군을 둘러싼 회’는 ‘민족차별과 투쟁’하며 권익운동에 앞장섰다. 각 지방에 흩어진 한인 단체들이 힘을 모아 권익 투쟁을 시작했다. 예컨대 오사카에 있는 한국오사카청년회의소, 재일기독교회관, 재일관서 지방 여자전도회, 재일청년연합회, 그리고 재일한국인민주간담회 등 5개 단체가 1974년 8월 모임을 갖고 ‘재 오사카 한국인의 생활을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그들은 오사카부 지사에게 공개질의서를 제출했다. 공개질의서는 3개 항목이 포함됐다. 한국인이 일본에 거주하는 한 기본권을 보장해 줄 것, 공영주택의 입주권을 보장할 것, 그리고 아동수당을 지급할 것 등이었다. 질의서를 받은 오사카부 지사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오사카 부는 공영주택 입주권을 재일 한국인에게 줄 것, 아동수당을 지급할 것, 그리고 노인에게 국민연금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이웃 지방은 물론 전국적으로 민단이 앞장서 일본 지방자치단체에 권익운동이 전개되었다. 민단 중앙본부는 산하에 권익옹호특별위원회를 두고 ‘차별 백서’를 발행했다. 각 지방본부에서 전개하는 권익운동을 신속하게 알려 다른 지방본부들이 권익투쟁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재일 한인들은 노령, 장애자, 유가족, 모자 복지 연금 등 각종 연금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연금과 수당 등은 세금을 내는 사람들에게 주는 혜택이었다. 재일 한국인들이 그간 세금을 내왔는데 일본 정부로부터 혜택은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의 세금고지서에는 세금을 내면 200여 가지의 혜택을 받는다는 항목이 명시돼 있다.
 
재일 한국인은 연금과 수당 이외에 오사카시의 경우 교원, 의사, 약제사, 수의사, 보건원, 간호사, 연구원, 서사, 보모, 전화 교환수, 자동차 운전사, 기계작업원 등 20여종의 시 직원으로 채용됐다. 1970-73년에 계속된 박종석 사건은 재일동포가 일본에 대해 이룬 첫 승리였다. ‘박종석을 둘러싼 모임’은 민족차별과 투쟁하는 연락협의회(민투련)’로 발전적 해체를 했다. 박종석 사건이 일어났을 때 조총련과 민단은 침묵했다. 그러나 박종석 군의 재판 결과를 본 민단은 재빨리 변신해 권익투쟁에 합세했다. 이 다음 편은 김경득, 한종석 사건이다
 
한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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