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캠시역에서 나와 오른쪽을 향하면 우리 이민 1세들의 약속 장소로 인기를 누렸다는 캠시 시계탑이 나타난다. 우리 6.25 전쟁 참전 기록이 있어 더욱 반가운 시계탑이다.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이민자들의 주머니를 털다가 끝내는 가정파탄의 주범이 된다는 카지노가 나타난다. 반대로, 왼쪽을 향하면 한국 이불집이 나타나고 한국 식품점이 보인다. 식품점 앞에서 길을 건너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그 옛날 고향 길에서 만났던 빙빙 돌아가는 형광 사인과 함께 ‘서울이발관’ 간판이 보인다.
 
문짝을 슬며시 열고 들어서면 대여섯 평 남짓한 직사각형의 공간이 나타난다. 이발의자 3개가 놓여 있고 안쪽엔 머리를 뒤로 젖히고 감을 수 있는 고급 미용실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입구 오른 쪽 첫 번째 이발의자 앞, 대형 거울 옆엔 파수꾼처럼 구형 라디오가 떡 버티고 있다. 
그 라디오 때문에 나의 토요일 오후가 즐겁다.  점심을 해결하고 이곳에 오면 이 조그마한 라디오를 통해 서울의 방송을 바로 들으며 잠시 서울 속으로 들어간다. 
내가 한 달, 혹은 달 반에 한 번꼴로 들르는 이곳의 매력은 명칭에서부터 시작된다.
헤어살롱도 아니고, 이발소도 아닌 이발관. 
영어의 나라 호주 시드니에서 만나는 우리의 반가운 이름인 이발관! 
서울이발관 관장(?)인 민 사장은 80년대 후반, 시드니에 도착하여 여러 일들을 했지만, 수입이 시원치 않아 놓았던 이발 가위를 다시 잡았다고 했다.  민 사장은 ‘서울이발관’을 통하여 두 아들을 잘 키워 모두 장가도 보냈고 손자, 손녀도 보았다.  
 
시드니에서 처음 만나 형님, 동생하며 우리 가족과 가깝게 지내던 형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민 사장도 문상을 왔다. 유족들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고 하기에 내가 소개했다. 고인이 서울 이발관 단골이었다고 한다. 이발하러 온 손님을 통해 우연히 소식을 듣고 캠시에서 족히 한 시간 거리임에도 수소문해서 달려왔다고 한다.
 
시드니에서 발간되는 한인 잡지에는 이발관 항목은 아예 없다. 100여개가 넘는 미용실 속에 오직 3개의 이발관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무 이발 의자에 넓은 나무 판을 올려놓고 나를 번쩍 들어앉혀 이발시키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려서 머리를 한번 싹 밀어 주면 모발이 건강하여 진다고 믿고 있던 내가 민사장과 서로 짜고 막내를 꼬드겨 머리를 빡빡 밀어 주었던 기억도 엊그제 같기만 하다.
 
요즈음, 한인사회에서 ‘코리안가든’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코리안가든’이 성공적으로 건립된다면, 이민 초창기 정착했다는 이곳 시드니 캠시 거리를 조성하여 이민 초창기의 거리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곳엔 ‘서울이발관’이 꼭  있어야 하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오래전 보았던 ‘캠시다방’도 있었으면 좋겠다. ‘서울방앗간’도 있어야 하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을지로에서 보았던 ‘헌책방’도 있으면 좋겠다. 이민 1세대가 세상 떠나면 자녀들에 의해 고인이 쓰던 모든 물건들은 버려지는데, 특히 모든 책들은 재활용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민 1세대의 고단한 삶 속에서 힘이 되어 주었을 모국어의 그 헌 책들이 고귀하게 취급되어 보존되고, 필요한 이들에게 읽혀지는 그런 헌 책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오 뉴스를 보내 드립니다. 오늘 정기 국회에서는 ……”
 
한 겨울 시드니에서 오후 1시가 되면 라디오 속 아나운서는 고국의 정오 소식을 전한다. 정기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몸싸움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씨발 놈들은 맨 날 밥 처먹고 한다는 짓거리라곤……”
 
뉴스를 듣고 있던 성깔 있는 민 사장은 대뜸 쌍욕으로 고국의 정치인들을 호통 치면서 서울의 정오를 맞는다. 
 
이발하고 있는 토요일 오후, 서울 이발관에서의 즐거움이다. 
 
장석재
저작권자 © 한호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