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아이가 천재이기를 바랬다. 아니 천재일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꽃다운 이십을 갓 넘긴 나이에 시집을 온 내 아내만은 그 고운 얼굴과 몸매를 평생 간직할 거라 장담을 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책을 볼 때 글씨가 잘 안 보인다고 하면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겉으로 덤덤하게 받아드렸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제는 갱년기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하면서 건강관리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있다. 아내가 웃으면 그냥 좋아 얼굴만 바라보았던 것이 엊그제 같다. 요즘에는 웃을 때 생기는 눈가의 잔주름 때문에 고민이라는 넋두리를 들어주어야 하고 주름이 안 생기게 웃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내의 부자연스런 얼굴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결혼 후 지금껏 이발은 아내가 해 주었다. 
신혼 초에는 큰 아이의 작은 의자를 가지고 욕조에 들어가 앉아 이발을 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숯이 많은 검은 머리가 평생 갈 거라고 믿었는데 내 머리도 나를 언제부턴가 배반하기 시작했다. 오십대 중반에 접어드니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고 흰머리가 검은 머리와 거의 동등한 비율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동안 이 머리의 노화를 감추느라 염색을 하곤 했었다. 이발을 해 주면서 염색까지 해 준 그동안의 아내 정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러던 아내가 드디어 올 초 더 이상 염색을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를 굳이 숨기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즐기라는 아내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나도 동감을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내 몸이 이런 식으로 변할지 상상을 못했다. 매일하던 달리기도 무릎의 통증 때문에 올해부터는 이틀에 한번으로 줄였다. 근육 운동도 어느 날 좀 과하다 싶으면 바로 어깨 통증이 도저 며칠을 건너뛰곤 한다. 거의 매주 했던 등반도 이제는 한 달에 한번 할 정도이다. 나만은 중년이 되어도 배가 나오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면서 같은 연배의 사람들 속에서 항상 자신만만했다. 그런데 내 배도 이제는 슬슬 그 중년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중년의 나이라는 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내면 속의 욕구가 상승 작용을 하여 실제로 이 자기최면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인지 평소 나는 정말 나이를 잊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가면의 상태가 한국에 가서 동창들을 만나면서 여지없이 벗겨지고 말았다. 비슷한 세월을 살아가는 친구들의 민낯을 대하면 중년 남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마의 주름은 그렇다 쳐도 입가에는 제법 패인 주름이 자리하고 목 부위에는 늘어진 피부가 확연하다. 더 가관인 것은 앞머리들이 거의 예외없이 훤하게 변했고 하는 행동이나 말투도 과거와는 다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따라 해야 하는가 잠시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 아니면 사실은 나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혼자서 부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 떨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내 속에서는 아직도 그 젊음이라는 놈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는지 그래도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계속 외치는 내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젊을 때는 그 팔팔하고 싱싱한 젊음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법이다. 
그 중구난방 하는 시절이 천년만년 계속 될 거라 믿는다. 그래서 대부분 젊음에 대한 찬가는 그것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은 중년이나 노년 나이대의 사람들이 읊조리는 것이다. 나도 아내가 처음 시집왔을 때 그 젊고 아름다움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중년이 되어 이제 생각해 보니 왜 내가 그 때 도둑놈 소리를 들었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점차 나이를 먹는 것이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몸이 이십대처럼 같지 않게 되니 모든 일에 신중해진다. 인간들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이 한없이 드러날 때 겸손해 진다고 한다. 모든 것이 가능한 것처럼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젊음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겸손을 바라는 것은 어린아이가 어른처럼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모순이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여 내 자녀들에게 맞지 않는 다른 잣대를 들이대면서 내 스스로가 고통에 시달리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것이 다 내 욕심이고 허상인 것을 그 때는 정말 몰랐었다. 
아이들 각자 철이 드는 시기가 다르다는 것을 나도 젊었으니 몰랐던 것 이다.
나이든 지금,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래서 내 자신이 더 부드러워지고 더 인내하게 되고 또 좀 더 현명해짐을 느낀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들이 경험에서 얻은 현명함을 후세들에게 전해주는가 보다. 
 
오십 대 중반이라는 언덕에 걸터앉아 나 자신에 대해 잠시 돌아본다. 
시간이 흘러 더 나이가 들면 이런 생각들은 또 어떻게 바뀌어 질까.
 
박석천(글무늬문학사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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