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 (Fiji)에서 집으로 오면서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화두가 은퇴였다. 
 
일정한 금액을 은행에 예치하면 피지에서는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 노후를 보낼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피지는 물가가 싸고 자연이 깨끗하며 치안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연중 날씨가 좋아 한국에서 은퇴를 한 후 남은여생을 보내기에 좋은 나라라는 것이다. 
우리가 겨울인 6월 말에 도착하여 약 2주를 피지에서 지내보니 날씨와 기온은 아주 쾌적했다. 
 
요즘 한국에서 자주 은퇴가 거론되는 이유는 올해인 2015년부터 소위 베이비붐 세대 (baby boomer)들이 본격적으로 은퇴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베이비붐 세대 또는 베이비부머란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약 800만 명을 일컬어 그렇게 부른다.
 
이 숫자는 한국이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높은 출산율 이였고 그 당시 한국 총 인구인 2천백만을 대비해보면 약 3분의 1일을 차지한 인구집단이다. 
 
집집마다 5-6명의 자녀는 다반사였고 그러므로 넘쳐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턱없이 부족한 학교는 2부제 수업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회고해 본다.
 
우리 집도 4명의 자녀에 아버지가 따로 몰래 차린 작은 집에서 얻은 3명의 자식들까지 합치면 여느 집 숫자와 비슷했다. 
 
그러면서 국토가 좁고 자원이 적은 국내에서의 경쟁은 모든 면에서 치열했고 대학은 말할 것도 없이 중학교, 고등학교도 힘든 입학시험을 치러야 들어갈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만원버스에 한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버스 안내양이 승객들을 꾸역꾸역 뒤에서 밀어 넣는 광경이 매일 되풀이 되었다. 
 
안내양의 수고를 덜어준다고 버스 기사는 출발과 동시에 운전대를 심하게 꺾어 버스 안의 승객들이 안쪽으로 쏠려 들어가게 하는 묘기를 부려 승객들의 원망스런 탄식을 자아내곤 했다. 
 
타 도시로의 이동에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가 유일하여 각 도시의 버스 터미널은 쏟아지는 이동 승객들로 몫이 좋은 가게들은 현금을 매일 쌀 포대에 쓸어 담기 일쑤였다. 
이 모두가 차고 넘치는 사람들 덕 이였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정부는 급기야 산아제한 정책을 소개하면서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라는 섬뜩한 표어까지 만들어낸다. 
 
그 상황에서는 오직 성적만이 인격을 형성시켰고 학창시절 친구는 경쟁자여만 했던 혹독한 교육환경에서 살아남은 베이비붐 세대들이 대학을 졸업할 당시는 그래도 오히려 산업화의 만개로 일자리들을 골라 가던 호 시절이기도 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집이 서울에 없어도 대학 졸업장과 직장 하나로 번듯한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러면서 은행 대출을 끼고 아파트 평수를 차근차근 늘려나가는 것이 그 당시에는 가능했다. 
 
그 세대는 대학시절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군방송 AFKN을 즐겨 들으면서 단어 몇 개를 알아들었다고 친구들에게 호기를 부리기도 했고 TIME 지를 매주 구독해 보면서 NEWSWEEK 지를 보는 친구들을 깔보는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미 문화원 출입에 괜히 어깨를 으스대기도 했으며 팝송을 즐겨 들었고 그 당시 유행한 음악다방, 대학가요제 그리고 해변 가요제의 탄생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대학 등록금은 대부분 부모님들이 도와주었고 그래서인지 교수가 강의를 밥 먹듯이 빼 먹어도 이를 항의하기 보다는 오히려 대학생의 권리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또한 그 세대 거의가 민주화라는 홍역을 한번 씩 앓으면서 급류 같았던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서 인생들이 극명하게 갈라지기도 했다. 
 
그 역동적인 세대들이 올해부터 은퇴를 시작하면 5년 후인 2020년에는 거의 7백만 명이 은퇴를 한다고 하니 은퇴 쓰나미가 몰려온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문제는 그들이 은퇴 준비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100명 중 겨우 2명만이 은퇴 준비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걸어온 길을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들은 부모를 부양하고 자녀들을 교육시키느라 자신과 배우자의 노후에 대해 재정적으로 준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그럴진대 그 세대를 일컬어 부모와 자녀 사이에 끼인 세대라고 하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은 가장 많은 자산을 아파트라는 부동산에 가지고 있는 세대라고 하는데 이 상황이 참으로 역설적이다. 
 
그들은 부동산을 통해 자산을 늘려왔고 아파트와 평생 같이 살아온 인생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아파트가 또한 자립의 상징이기도 한 이유다. 
 
아파트라는 부동산을 투자목적으로 취득한 이 세대는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현금이 없이 은퇴하는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그들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이 재정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아파트는 더 이상 재테크의 수단이 아니게 되었으며 은퇴를 준비할 이 시기에 맞물려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을 목전에 둔 자식들이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교육이 고등학교를 넘어 취업 준비에까지 부모의 등골을 휘게 만들고 있다. 
 
취업이 안 되니 대학원을 간다는 자식들을 위해 등록금을 대 주어야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지출을 줄일 묘안이 없다. 
 
설사 취업이 되어 직장을 다녀도 이 세대는 자식 결혼과 집 장만에 어느 정도 자금을 대 주어야 한다. 
 
이런 판국이니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몫 좋은 지역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현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다. 
 
1959년에 태어난 나도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고 은퇴가 이제 피부에 와 닿는 나이이다. 
그러나 일이 곧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현재 내가 하는 일을 즐기는 나는 5년, 혹은 10년 후인 65에도 일을 그만 둘 생각이 없다. 
 
이것이 아내와 내가 가끔씩 의견 충돌을 빚는 사안이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은퇴 나이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호주에서 살고 있는 나는 한국의 동년배들에 비해 행운아인 셈이다. 
 
이곳에서 교육받은 자식들 직장이나 결혼 후 생활에 대해 한국처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 (Greece)에서 호주로 이민을 온 부모를 따라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은 동료 교수 피터는 두 자식 앞으로 집 한 채씩을 물려주는 것이 은퇴의 목표라는 말을 듣고 흥미로웠지만 바람직한 계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피지에서 2주를 지내보니 정말 밤거리를 다녀도 안전했고 날씨는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골프나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항상 즐길 수 있다고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등산을 하기에도 산자락들이 구석구석 깔려 있다. 
실제로 한나절 혼자서 수도인 수바 (Suva)가 한눈에 들어오는 '코로밤바 산 (Mt Korobaba)'을 오르면서 남태평양 섬들의 산이 지니고 있는 특색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해변을 따라 지천에 깔린 휴양지를 보면서 이곳 피지를 은퇴하기에 좋은 나라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은퇴는 일의 연장 이여야 하고 봉사를 통해 남에게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코로밤바 산의 넓은 품처럼, 피지의 편안하고 안락한 자연처럼 나의 은퇴는 앞으로 사회의 바람직한 방향으로 더 고민하고 구상하여 만들어져 갈 것이다. 
 
박석천(글무늬 문학사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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